F. 라가드 스미스
▲F. 라가드 스미스 박사.

최근 F. 라가드 스미스(F. LaGard Smith) 박사는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평등, 공평, 그리고 다가오는 박해’(Equality, equity, and the coming persecution)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당신은 평등을 믿는가? 우리는 이 진실들이 자명해지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다인가? 그렇다면 누가 현재 의회에서 추진 중인 평등법을 반대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절묘하게 들리는 법제화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큰, 나쁜 늑대!

그것은 매우 정교하다. 그러나 3개의 관련된 어젠다가 추진되는 중이다. 이를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으로 생각해 보라. 작은 것이 큰 것 안에 담겨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가장 크고 매력적인 이것은 사회적 정의라는 인형이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하며, 모든 백인들은 '최소한 의도적이지 않은 인종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극단주의, 조작, 위선을 떠나 인종평등은 정당한 대의이다.

사회적 정의 인형은 그 다음으로 작은 젠더 인형을 가려 준다. 이는 정확하게 동일한 모양으로 똑똑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마치 젠더 이슈가 인종 이슈와 같이 합법적인 것처럼 말이다. 평등법 아래에서는 누구도 절대로 LGBTQ나 성전환자들을 차별해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소녀로 정의하는 소년은, 소녀들로 구성된 스포츠 경기팀에서 제외되어선 안 된다. 스스로를 남자로 정의하는 여자는 양심에 종교적 거리낌을 지닌 교회로부터 고용을 거부당해선 안 된다(심지어 이것이 헌법적으로 명시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해도 말이다!).

여러분이 들어보지 못했다면, 깨어난 세계에는 ‘평등’이라는 새로운 대명사가 존재한다. 젠더 인형 안에 들어있는 평등 인형은 ‘평등’의 일란썽 쌍둥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지 말라. 이 나라 건국의 바탕이 된 기회의 평등이 아닌 좌파의 ‘평등’의 목표는 경제적·사회적 결과의 평등이다. 결과의 평등을 도출하기 위해 고안된 모든 체계는 엘리트 기획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수준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만약 그것이 그들이 지닌 권력의 지위나 교외에 위치한 값비싼 집과 멋진 SUV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오늘날 그들 누구도 진정한 결과의 평등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평등은 그들 문 앞에서 갑자기 멈춘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평등을 추구한다면, 근원으로 가야 한다. 평등은 ‘창조된 평등’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는 교훈책에 기록된 것처럼 보장된 성과 기회의 평등에 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이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모든 이들이 영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종교적 전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의회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주장한 제리 나들러 의원처럼 당연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보수적인 법원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결정적인 배경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신앙에 대한 불평등한 차별이 만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기독교 대학, K-12, 기업 및 입양 기관의 경우, 교활한 평등 법안은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시험이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문을 닫을 용기가 있는가? 아직까지 그 궤적은 희망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에 올 때 본문은 “오늘 당신이 섬길 자를 택하십시오”(수 24:15)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