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신약 성경에 나오는 ‘복음(εὐαγγέλιον, gospel)’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good news)’이다. 당시 헬라 사회에선 이것을 정치적, 법정적, 군사적 용어로 다양하게 사용했다.

구약 시대엔 ‘속량(redemption, 贖良)’, ‘포로에서의 해방(시 126:1-2)’, ‘복역의 완수(completion of hard service, 사 40:2)’등 의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이 세 개념들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애굽,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며, 신약에선 죄인의 ‘율법의 노예’에서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롬 8:1-2).”

죄인을 율법에서 해방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딤후 2:8). 그의 죽음이 택자를 대신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심으로서, 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켰다.

성경이 복음을 ‘그리스도와 동일시(막 1:1)’하거나 ‘십자가 복음’으로 지칭한 기저(基底)엔 그리스도의 죽음이 깔려있다(행 2:36).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율법을 완성해 주심으로, 택자는 그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의 수혜자가 된다(롬 10:4).

◈복음의 기원

‘복음의 기원’을 그것이 확연하게 나타난 아브라함에(갈 3:8, 17) 두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영세 전(since the world began)’이 ‘원 기원(original beginning)’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롬 16:25-26).”

‘영세 전의 복음’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었다가 그의 섭리 따라 각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벧전 1:20)”.

‘구약 시대엔 복음이 감춰졌다’는 것은 흔히 상상하듯, ‘그 땐 일체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때도 복음의 비밀을 허락받은 사람들, 예컨대 아벨(히 11:4), 아브라함(갈 3:7), 다윗(행 2:25-28) 같은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선지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제(신약 때) 복음이 나타난 바 됐다(롬 16:26)’는 말 역시 ‘신약 시대엔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다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됐다’는 뜻이 아니다. 그 때도 복음의 비밀을 허락받은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알려졌고(마 11:25),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겐 ‘공개된 비밀(the open secret)’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예정’과 ‘사단의 책략’과 연관돼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4-15)”.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3)”.

비유컨대, 계시가 감춰진 구약 시대에 복음을 알지 못했던 자들은 ‘눈감은 소경’이었다면, 계시가 나타난 신약 시대에 복음을 알지 못했던 자들은 ‘눈 떤 당달 소경’이었다. 그들은 육체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면서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했다(요 14:8).

복음이 영세 전에 기원되고, 그것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죽음이 창세전에 예정되고(계 13:8), 택자 구원이 창세 전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예정(엡 1:4)됨은 우연이 아니다. 구원은 ‘영세 전의 복음’의 비밀이 허락된 택자들(마 13:11)에게만 주어진 은사이다.

◈복음은 믿는 것인가 순종하는 것인가?

성경은 주로 복음을 ‘믿음’과 연관짓지만, 때론 ‘순종’과 연관짓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오해하여 복음이 ‘믿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행위(순종)’도 요구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순종’은 ‘믿음’에 다름 아니다. 상황과 어법에 따라 표현을 달리했을 뿐 사실은 동의어이다. 실제 성경은 둘을 ‘동일시’하거나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한다. 대표적인 몇 구절들을 살펴보자.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느니라(히 4:6).” 여기서 ‘순종’의 의미는 3절의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는 말씀을 통해 ‘믿음’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롬 10:16).” 동일 구절 안에서 ‘순종’과 ‘믿음’을 상호 교호적(Interactively)으로 쓰며 둘을 동일시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믿음’을 ‘복음에 대한 마음의 순종’으로 표현하며 둘을 동일시했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히 4:6-7)”.

여기에 등장하는 ‘순종치 아니함’과 ‘마음의 강퍅’은 모두 ‘불신앙’을 의미한다. 그 근거는 4절의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는 말씀에서 추적된다.

이처럼 성경이 ‘복음에 대한 신·불신(信·不信)’을 ‘행위의 순종·불순종(順從·不順從)’이 아닌 ‘마음의 순종·불순종’으로 ‘개념 정의’한 것은 전자가 후자보다 더 본질적인 순종이기 때문이다.

사실 ‘순종’이라고 개념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순종’뿐이다. ‘행위의 순종’은 강요로 이끌어낼 수 있으나, ‘마음의 순종’인 ‘믿음’은 강요로는 안 되며 오직 ‘성령으로’만 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아가 파쇄되고, 지정의가 굴복된 자, 곧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된(고후 10:5)” 자만 믿을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 9절에 대한 상호보완적인 두 번역은 ‘믿음’이 곧 ‘순종’임을 확정지어주는 말씀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refused to believe)’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행 19:9, NIV)”. “어떤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고(believed not)’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행 19:9, KJV)”.

◈죄인을 심판하는 것은 율법인가 복음인가?

죄인이 받는 심판은 ‘율법의 심판인가, 복음의 심판인가?’ 그 답은 ‘둘 다’이다. ‘율법’을 어겨 심판 받고, ‘복음’을 믿지 않아 심판 받는다. 실제 성경도 두 가지를 다 말한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다”는 ‘율법의 심판’을 말한 것이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느니라(요 3:18)”는 ‘복음의 심판’을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율법 심판’에 대해선 그들 안에 ‘내재된 양심’과 ‘율법’에 의해 그것이 충분히 인지됐기에 그것을 수납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복음 심판’에 대해선 ‘그 은혜로운 복음이 어찌?’라며 의구심을 표한다.

그러나 사실 ‘복음 심판’은 ‘율법 심판’에 다름 아니다. 이는 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완전한 율법의 의’가 그에게 없기에, 율법이 그를 심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음 심판’은 ‘율법 심판’과 직결되어 있기에 둘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성경은 ‘복음 거부의 죄’를 ‘율법을 어긴 죄’보다 더 악한 것으로 간주한다. 후자는 ‘그것의 엄격함’과 ‘인간의 연약성’으로 인해 변명의 여지를 주지만, 전자는 값 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고의로 거부하는 ‘완고한 죄’라서 어떤 핑계도 안통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불신앙’을 ‘믿지 않는 악심(an evil heart of unbelief, 히 3:12)’, ‘강퍅함(히 3:15)’으로 독하게(?)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복음의 거부’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희생을 짓밟고 성령을 욕되게 한다는 점에서 비할 수 없는 극악이다. 성경이 ‘복음 거부의 죄’를 ‘율법의 범법’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구분한 데서도 그것의 엄중성이 잘 드러난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이러한 ‘복음 심판의 엄위성’은 ‘복음을 믿느냐 안믿느냐’를 심판의 결정적인 잣대로 삼게 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