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속 암시적 형상화, ‘한국’으로 바꾸면
국수주의적·민족주의적 자긍심 측면서 거의 판박이
이 문화적 속성, 日 국수적 자긍심만큼 신앙에 부담

일본 귀멸의 칼날 애니 만화
▲일본 만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일본 문화와 기독교: 기독교 신앙을 국가 발전의 장애물로 본 일본 지도층

메이지 시대(1868-1912),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서구 문물 수입에 있어 철저히 선별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부국강병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서구의 법제(法制), 군제(軍制), 과학기술 수입에는 열심을 냈지만, 기독교 신앙, 인권 사상, 그리고 개인주의 등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서구문화 요소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본 근대화를 주도했던 조슈 번 지사들은 기본적으로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 사상에 심취되어 있었는데, 이는 일왕을 천하 유일의 지도자로 옹립하고 서구 세력과 맞서 자신들만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자민족중심주의 사상이었다.

이렇게 국수적이고 전근대적인 사상을 고집하던 당시 일본 지도층에게,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 신앙은 국민 통합에 있어서, 혹은 국민의 집단적 세뇌에 있어서 최대 걸림돌로 비춰졌다.

메이지 시대 일본 지도층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갖고 있었다. 제국을 건설하려면 식민지가 필요한데,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으려던 조선, 청나라, 그 외 동남아시아 각 지역으로 이미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지도층은 자신들이 아시아 지역 패권국이 되려면 온 국민이 일치단결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식민지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말이 좋아 일치단결이지, 사실상 명령만 떨어지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만한 맹목적 충성심을 가진 충견을 길러내고 싶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메이지 시대 교육정책은 일본국민 전체가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제국 번영을 위한 정복 욕망에 물들도록 국민을 세뇌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원칙적으로 왕이나 집권자들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지만, 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 또한 특정 민족의 번영을 위해 맹목적으로 헌신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인들의 궁극적인 충성과 헌신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정치권력에 대한 순복은 근본적으로 수동적 성격을 갖는다.

정치권력과 민족에 대한 이런 수동적 태도는 제국주의를 지향하던 일본 지도자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 신앙은 정권과 민족에 대한 적극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 고취를 저해하는 사상이었다. 이에 일본의 기독교회는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직접적인 박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군국주의 및 전체주의 사고에 물든 일본 국민들에게 철저히 외면을 받았다.

일본
▲메이지 시절, 일본 초기 개신교 지도자였던 오시카와 마사요시(1850-1928), 츠다 센(1837-1908)과 그의 기독교인 제자들. 사진 속에는 한국인 유학생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일본 정부의 전체주의 정책 때문에 일본 내부 전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같은 시기 한국인들은 국가가 몰락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까닭에, 국가를 위한 충성이라는 가치를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대신 민족 이념이 강해지긴 했지만, 그 역시 정복과 번영보다 생존과 회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국인들은 더 이상 의지할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이념과 신앙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원래 일본을 아시아 지역 선교 중심지로 삼으려 했던 미국 선교사들 다수가 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국 성결교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901년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 찰스 카우만과 어니스트 길보른은 원래 일본 복음화를 목표로 도쿄에 동양선교회를 창설하고 도쿄 성서학원을 열었다.

그러나 일본인 기독교인 전도는 정체된 반면, 도쿄 성서학원에 와서 가르침을 받고 귀국한 김상준과 정빈에 의해 한국에서의 성결교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에 동양선교회 측은 아시아 지역 선교본부를 도쿄에서 서울로 옮기게 된다.

◈일본문화와 한국인: 일본과 판박이인 한국인들의 국수적 자존심

한국 성결교회의 사례로 보아 알 수 있듯, 1900년대 초반 한국은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전파된 기독교 신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 입장에서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골칫덩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국인들을 일제에 충성하도록 포섭하고 세뇌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한국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까지 겹쳐, 민족 이념과 기독교 신앙이 거의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일제가 한국 기독교회에 일찌감치 신사참배와 예배 중 동방요배를 강요한 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 충성을 포기하고 일왕과 일본 제국에 맹목적 충성을 바치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일본의 자민족중심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신념이었고, 따라서 일본 내 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신사참배와 예배 중 동방요배를 강요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1891년 우치무라 간조 불경 사건(개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우치무라 간조가 교회 내 일왕숭배를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고, 한국에서는 저 유명한 신사참배 강요 사태가 발발했다.

야스쿠니 신사 일본 신사참배 우상숭배
▲신사참배의 대명사격인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livejapan.com
일제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몰락한 후에는 더 이상 국민들에게 신사참배나 동방요배를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일본 국민의 충성 대상을 일왕과 일본 제국으로부터 일본 민족과 전통문화로 전환했다. 제국으로서의 일본은 패망했지만, 고유한 정신문화를 가진 자주적인 민족으로서의 일본은 건재하다는 점을 내세워 기존의 국수적 정체성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제해권 확보를 위한 군사적 파트너로, 그리고 냉전 시기 공산주의 패권국 소련과 중공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세력확장 저지를 위한 정치, 경제적 방파제로 막대한 지원 하에 급격한 속도로 국력을 회복하면서, 일본문화 고유의 국수적 성향은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 선봉에 일본의 정신문화 및 대중문화가 서 있었다.

1950-1960년대 일본은 자국의 선불교 문화를 미국 서부 해안에 크게 유행시켰다. 일본 내부적으로는 태평양 전쟁 패망의 국민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소설과 시대극이 크게 유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일본에서는 국민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 덕분에, 일본 대중문화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센고쿠 시대 서사를 풀어내는 작품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중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시대극은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일본의 시대극 대부분은 이런 목적에 더해 제국주의 열강 시절, 세계 최강국 미국과 맞상대하던 시절의 국가적 자존심과 투쟁심을 되살리려는 동기를 짙게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부문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슬램덩크> 작가로 유명한 이노우에의 타케히코의 <배가본드>, 와츠키 노부히로의 <바람의 검심>, 그리고 고토게 코요하루의 <귀멸의 칼날>이 대표적이다.

일본 시대극 만화 애니 민족주의
▲일본의 시대극 만화 <배가본드>, <바람의 검심>, <귀멸의 칼날>. 일본 전통문화의 우월성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국수적 민족주의 사상을 반영하는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자민족중심주의의 최대 피해자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에서, 그것도 민족 이념을 강조하는 진보정권에 의해 조장된 극심한 반일 세태에도 불구하고 <귀멸의 칼날> 같은 작품이 극장가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현재의 상황은 아이러니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일본의 대중문화, 특히 일본 시대극 뒤에 담긴 일본의 문화적 자부심과 배타성, 그리고 제국주의적 요소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아니,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에 욱일기가 한 컷만 나와도 몸서리를 치는 것이 한국인들의 일본식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중문화 콘텐츠, 그것도 시대극 콘텐츠는 국내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적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국인들 자신이 일본과 유사한 민족 이념과 전체주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귀멸의 칼날> 같은 작품 속에 암시적으로 형상화된 ‘일본’이라는 이상을 ‘한국’으로 바꿔놓는다고 가정해 보자.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자긍심 측면에서 일본과 한국은 거의 판박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이런 문화적 속성은 일본의 국수적 자긍심만큼이나 기독교 신앙에 큰 부담이 된다. <계속>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