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각하는 미군, 따라가겠다고 나선 기독교인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떠오른 장진호 ‘고토리’ 별
장진호 전투로 중공군 2주 지연, 흥남철수 성공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당시 모습.

장진호 전투는 지금부터 70년 전 발생한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북한군이 유엔군에게 계속 밀리면서, 임시 수도를 평양에서 압록강 근처의 강계로 옮기게 된다. 미해병 1사단은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장진호 지역까지 북진을 한다.

1950년 11월 14일, 장진호 근처의 하갈우리에 미군이 들어와, 하갈우리장로교회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해방 후 공산치하에 몰래 숨어서 예배드리던 하갈우리장로교회 교인들이 숨겨 놓았던 교회 종을 가지고 나왔다.

교인들은 11월 23일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미군들과 함께 지켰는데, 11월 30일 장진호 지역에 미군 병력의 10배가 넘는 중공군 6개 사단 12만의 포위망이 구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장진호 기념비 고토리 별 Chosin Few
▲미국 국립해병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 위 CF는 ‘Chosin Few’, 별은 ‘고토리의 별’을 의미한다. ⓒ김대운 목사 제공
그래서 11월 30일 주일 미군은 퇴각하기 전 철수 예배를 드렸는데,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피난민들이 함께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신분이 완전히 노출되어 공산군이 다시 들어오면 처형 1순위가 될 것이기에, 미군을 따라 남한으로 내려가고자 한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스미스 사단장에게 비행기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비행기로 철수할 경우 활주로를 지키는 최후의 병력과 함께 자신들을 따라 남한으로 가겠다고 하는 기독교인들과 피난민들은 함께 갈 수 없으니, 육로로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그 유명한 장진호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장진호는 북한에서도 가장 추운 개마고원에 위치해 있다. 전투가 진행된 2주 동안 평균기온은 영하 11도, 가장 추운 날의 오전 기온은 영하 45도까지 내려갔다. 물도 얼고 전투식량도 얼고, 기관총의 노리쇠도 얼려버리는 강추위였다.

중공군은 미군 하나만 죽일 수 있다면 열 명이 죽어도 괜찮다면서, 제일 앞에서 공격하는 군인들은 총도 없이 막대기 수류탄 2개씩 양손에 들고 달려왔다고 한다.

하갈우리에서 출발한 미 해군 병력은 고토리까지 왔다. 고토리와 진흥리 사이를 잇는 수문교가 끊어진 상태였다. 다리를 연결해야 하는데, 장비가 없어서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비행기로 장비를 보급받아야 하는데, 기상 여건이 도저히 비행기가 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미군과 함께 있던 기독교인들이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별 하나가 떠오른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당시 모습.

이 별로 인하여 다음 날 맑은 날씨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다음 날 미군은 비행기가 떠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과 미군이 함께 기도하는 장면이 미 해병대 박물관에 ‘고토리의 별(The Star of Kotori)’이란 제목의 그림으로 전시돼 있다. 그리고 이 별은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군 1사단 전우회의 공식마크가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 모든 것을 주께 맡긴 성도들은 주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해방 후 5년간 공산치하에서도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고, 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로 향하는 성도들 앞에 나타난 끊어진 다리는 실로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날 밤 떠오른 고토리의 별은 그들에게 주님의 인도하시는 손을 바라보게 했다.

이 전투에서 미해군 1사단은 중공군 7개 사단을 궤멸시킴으로 중공군의 함흥 진출을 2주간 지연시켰고, 그 결과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때 장진호를 철수하는 미해군 1사단을 따라 흥남까지 온 기독교인들과 피난민이 4,500여명이었다. 흥남 부두에 모였던 10만 명의 피난민 중 기독교인이 무려 95,000명이나 되었다. 자신들의 신분이 완전히 노출되었기 때문에,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서 함께 흥남으로 왔던 것이다.

그리고 장진호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국군 부대가 있었으니, 경찰로 구성된 화랑부대였다. 한국 경찰은 유엔군에 배속되어 함께 전투에 참여했었는데, 장진호 전투에도 화랑부대의 1개 소대가 기관총부대로 참전하여 미해군 1사단의 철수작전에 큰 공을 세웠다.

11월 27일부터 시작된 장진호 전투에서 미해병 1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1만 7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 1,029명, 실종자 4,894명, 부상자 4,582명, 동상 등 비전투요인에 의한 사상자 7,328명이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그래서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가리켜 ‘Chosin Few’로 부른다. (당시 유엔군이 사용한 지도가 일제 치하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일본식 발음으로 장진을 초신으로 불렀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참전 생존 군인들을 가리키는 ‘Chosin Few’ 문양의 모자.

살아 돌아온 자가 극히 적었다는 의미다. 특별히 선택된 자만 살아남았다는 의미로 Chosen Few로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만날 때마다 “너 이제 몸 좀 녹았냐?”라는 말로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미군은 장진호 전투를 계기로 일명 스키 파카로 불리는 방한복을 개발, 보급했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의 극적인 승리와 고토리의 별은 이 땅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준다. 해방 후 북한에서 5년 동안 숨어서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한국교회의 부흥의 초석이 되어주었다.

김대운 목사(수원 경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