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 질병, 세균, 우한폐렴
▲코로나19 바이러스 ⓒ픽사베이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한복음 1:37-38)”.

시선(視線)을 어학사전에서는 ‘눈이 가는 방향, 관찰자와 특정 사물 간의 눈길’이라고 합니다. 관심(關心)을 어학사전에서는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안드레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을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안드레 당신의 시선과 관심은 어디에 두고 있느냐?”라는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안드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베드로와 형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라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라”고 누가복음 6장 14절에 나와 있지만, ‘동생’이란 단어의 원문 의미는 한 태에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아덴포스’라는 단어로, 동생의 의미보다는 형제의 의미이기에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갈릴리 벳세다가 고향이며, 형제 베드로와 함께 어부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헬라식 이름으로 ‘강한 남자, 남자다운’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강한 남자로 살기를 바라면서, 이름을 안드레라고 지어준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그의 본업은 그 시대의 천한 직업이었던 어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 안에는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여서, 평소 메시아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열망이 깊은 탓에 예수님과 함께 하루 밤을 지내면서 예수님에게서 메시아를 보게 되었고, 자신이 본 메시아를 시몬에게 전하면서 두 형제는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옛말에 “개 눈에는 똥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더 잘 보고 더 잘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그 시선 역시 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 귀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관심을 두고 시선을 그 쪽으로 옮긴다면,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옵니다. 현재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절한 관심으로 묵상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뜻이 보이게 되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 즉 재물이나 권력, 건강이나 쾌락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소유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는데, 그리고 모태신앙인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서 보이지 않는가? 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가? 왜 신앙생활이 더 성숙되지 못하고 날마다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가?’ 하는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더 깊은 관심을 두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처럼 하나님께 최고의 관심을 두고, 그 방향으로 시선을 모으는 삶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도 더욱 성숙함으로 날마다 찬송과 기도의 생활이 이어지고, 비로소 이웃을 향한 관심과 시선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속 안드레의 가장 큰 관심이 예수님을 통한 메시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인물 중 사사 사무엘도 하나님께로 향한 전적인 관심과 시선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을 향해 최고의 관심과 시선으로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들은 말씀을 남김없이 복음 전파에 쏟으며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주의 군병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늘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안으로 속을 끓이지 말고, 답답하고 앞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고 절망으로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 터놓고 질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질문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듣는 사람에게는 생각하게 만들며, 더 높은 질문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솟아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질문이 없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또한 질문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질문은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창의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가정에서 자녀들을 키울 때를 돌아보면, 자녀들은 부모들이 대답할 수 없는 난해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질문을 통해 아이들은 점점 어른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좋은 질문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코 안전한 지대가 아님을 깨닫게 하고, 그 동안 누려왔던 기존적인 선입관, 그리고 신념 체계를 뒤흔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질문은 이미 포기했던 마음에 새로운 용기를 심어주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좋은 질문은 주저앉지 말고 새롭게 일어나라는 요청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질문을 하거나 받기를 싫어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기득권에 안주한 채,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질문 하나만 바뀌어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질문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고, 어쩌면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관심과 시선으로, 하나님께 늘 질문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왜 우리에게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를 주셔서 이런 고통 속에 살게 하시는지도 물어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에게 예수님을 향한 관심과 시선이 없었다면, 아마도 시몬과 더불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안드레처럼, 하나님을 향한 관심과 시선을 행동으로 나타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