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성인가 계시인가?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은 과학, 지적 논리 등 인간적인 어떤 것에 의해 담보되지 않는다.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요 2:25)”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 하나님은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자증하신다. 물론 이는 이성과 과학을 통한 변증이 불필요하다거나 반이성주의를 표방한다는 말이 아니다. 할 수 있는 한 세상을 향해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가 하나님을 알게 하지는 못한다.

또한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데 ‘이성 영역(sphere of reason)’과 ‘계시 영역(sphere of revelation)’을 무 자르듯 구분지울 수 있다거나, 어느 한쪽 영역(계시)만 그것에 소용되게 한다는 뜻도 아니다.

성경의 ‘유기적 영감’ 원리에서처럼, ‘이성’을 사용하는 중에 초자연적인 ‘계시의 빛’이 임하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계시의 빛’을 통해 ‘이성’이 거룩하게 고양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둘이 ‘연속선상(Continuous line)’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계시(revelation)’와 ‘이성(reason)’의 관계 설정은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소위 ‘계시 신학(revealed theology)’과 ‘자연 신학(a natural 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논쟁을 이어왔다. 그리고 둘의 경계선을 중심으로 좌·우 진영에 속하므로 그 명칭이 결정됐다.

둘의 접경지(the territory of border, 接境地) 쯤에 있었던 신학자가 아마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1274)가 아닌가 싶다. 계시에 의해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친 점에선 그도 우리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계시’와 ‘인간 이성’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부정하고 둘의 연속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는 ‘자연신학자(a natural theologian)’로 분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도 역시 넘사벽(out of his league)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얼마 전, 그간 해 오던 모든 저술활동을 접고 그의 저작들을 미완성으로 남겨두게 한 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비한 환상 체험’이다.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극적이었는지, 그가 한 친구에게‘내가 지금껏 쓴 모든 것은 지금 본 것과 비교해서 지푸라기에 불과하다(History of Christian Theology, W.C. Placher, 이경섭 역, 212쪽)’고 했을 정도였다.

약 400년 후 유사한 경험이 철학자이며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에게서도 일어났다.

“1654년 은혜의 해. 11월 23일 월요일 성 클레멘트(St. Clement )의 축제… 저녁 10시 30분경부터 12시 30분경까지. ‘불,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확신, 감정, 기쁨, 평화(Ibid, 288쪽)’.”

◈이성과 계시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역사적으로 ‘이성’과 ‘계시’를 적대 관계로 여긴 사람들 중 ‘예루살렘(Jerusalem)과 아덴(Athens)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했던 터툴리안(Q. S. F. Tertullianus, 155- 240)이나 이성을 ‘음녀’라고 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만한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칼빈(John Calvin)도 ‘기독교의 어리석음(the foolishness of Christianity)’ 혹은 ‘어리석은 기독교(foolish Christianity)’를 표방하며 ‘인간 이성’의 무능을 말했지만, 그들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면서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등을 광범위하게 인용한 것에서도 ‘이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 읽혀진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도 이런 그의 인식의 일단이 엿보인다. “하나님은 무지를 핑계삼아 도망치는 자가 없도록 자기의 신적 능력에 관한 어떤 지성을 모두에게 친히 넣어주셨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방울들을 떨어뜨려 주신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한분으로 계시고 그가 우주의 창조주라는 것을 알게 된다. …

확실히 모든 사람은 어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마치 골수에 있듯 깊이 고정돼 있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 간에도 ‘이성의 한계’를 가늠하는 척도가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우리가 ‘계시(revelation)’와 ‘이성(reason)’의 불연속성(discontinuity)을 주장한다 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데 이성이 무용하다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反知性主義)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자연 계시(이성)’과 ‘초자연적 계시(성경)’는 서로 불가분리이다. 전자의 도움 없인 후자를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이성이다. 이성의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하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둘의 불가분리성(inseparability)’이 곧 ‘둘의 연속성(continuity)’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명석한 두뇌와 명료한 이성으로 성경을 읽는다 해도 성령의 가르침 없인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이해는 가능할지 모르나,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엔 도달할 수 없다. 이는 유대인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으면서도 성경을 알지 못한 것이나(마 22:29),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성자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동시대인들(요 6:36; 14:9)의 예를 통해서도 확증된다.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마 13:13)”고 책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계시’와 ‘이성’의 간극은 서로 오갈 수 없는 구렁(a great gulf)이 있는 ‘낙원과 음부’만큼 멀다(눅 16:26). ‘삼위일체 계시’는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진다.

사도 바울이 “세상이 자기 지혜(이성)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알게 하셨다(고전 1:21)”고 한 것은 ‘계시(전도)로만 알려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한 것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 17).”

◈성령의 신앙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이 위로부터의 계시 즉, ‘성령’에 의존 됐듯, 하나님께 올라가는 우리의 ‘믿음’과 ‘신행’도 성령으로만 하나님께 가납(acceptance, 嘉納)된다. 극단적으로, ‘성령의 신앙’이 아닌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성령의 신앙’은 곧 ‘삼위일체 신앙’이다. “성자와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요 15:26)”은 삼위일체 신앙이 고백되는 곳에서만 자신을 현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벨의 예물에 대해 증거했다(히 11:4)”는 말은 ‘삼위일체적인 아벨의 믿음을 하나님이 참된 것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신약적으로 풀면, 아벨이 제물을 드릴 때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사람 되어 와 죽으실 그리스도시다’는 믿음으로 드리니 그 예물에 삼위일체 성령의 증거가 따랐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대속물로 드렸을 때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드렸다(히 9:14)”고 했다. 이는 그의 드림(offering)이 삼위일체적이었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납됐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반삼위일체(non-trinity) 신앙은 ‘성령의 부어짐과 증거’가 따르지 않기에 ‘성령의 신앙’이 아니다.

스데반이 단일신론자들(monarchians)인 유대교도들을 향해 ‘성령을 거스리는 자(행 7:51)’라고 한 것은 삼위일체이신 성자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성령의 현현을 막았다’는 말이다.

예수를 ‘사람’으로만 믿고 ‘제2위(位) 성자’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의 신앙 역시 성령이 없다. 성령의 원천인 삼위일체가 그들의 신앙에 구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부르짖는다고 다 온전한 ‘성령의 신앙’이 아니라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기형적으로 성령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 같은 세대주의적인 ‘성령의 신앙’은 ‘균형 잡힌 삼위일체 신인식’에 기반하지 않기에, 지나치게 ‘성령 쏠림(inclining to spirit)의 신앙’ 형태를 취했다.

또 신천지나 전도관(박태선) 같은 이단들이 ‘성령’을 강조한다고(그들의 교주를 ‘보혜사’로 칭한다) 결코 ‘성령의 신앙’이 될 수 없다. 이는 그들의 성령은 ‘하나님의 3위(位)로서의 성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성령은 육체가 없으신데 ‘보혜사’로 자처하는 그들 교주는 육체를 입은 사람이고, 또 하나는 성령은 ‘제3위(位)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복된 삼위일체, ‘성령의 신앙’이여.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