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율법의 가르침을 받았는가?

성경에는 사람들이 다양한 사연, 경로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러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 혹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죄와 심판에서 건져주시는 구주로 믿는다’ 혹은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예수를 죄인의 구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려면 먼저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죄의 인식’을 가져야 한다(갈 3:24, 롬 10:4).

물론 그 ‘죄 인식’은 그것으로 인해 거의 초주검이 되거나, 정신이상이 될 정도가 안 되면 그것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일부 ‘극단적인 청교도 회심준비론자들’의 ‘죄 인식’과는 다르다(그들은 이런 극적인 회심체험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 이완 정반대로 그리스도는 꼭 ‘죄인의 구주’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죄의 인식’이 없어도, ‘종교적인 관심’ 혹은 ‘질병’이나 ‘삶의 벼랑 끝’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조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주’시기에 ‘죄의 인식’이 없는 자에겐 그가 필요치 않다. 불문법(양심)을 통해서든 성문법(율법)을 통해서든‘죄의 인식’을 가진 자에게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물론 처음엔 다양한 동기에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만 점차 성경을 알아가면서, 자기가 심판받을 죄인임을 알고 구주 그리스도께로 가게 된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율법에서 ‘죄와 사망’이 아닌, ‘의와 생명’을 보는 자들도 있다. 자기 의에 매몰된 율법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정죄의 법’이 아닌 생명을 선언하는 ‘의의 법’이기에, 그들을 율법 아래 안착(安着)시키고 그리스도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물론 이는 ‘몽학선생(a schoolmaster, 갈 3:24)’ 율법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해, 율법을 오용(誤用)한 결과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

‘인간이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일견 그리 심각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쯤으로 여겨진다. 비유컨대, 자연만물이 ‘자연 법칙’ 아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수납된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그런 것과는 사뭇 다른, 매우 엄위한(stern) 말이다. 곧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해야 할 의무 아래 있으며, 만일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정죄를 받는다’는 뜻이다.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죄인의 위치에선 그 말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세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쟁취하려고 ‘적극적으로’ 율법 아래 머무는 율법주의자이다. 자력으로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율법의 오해로 말미암은 대단한 착각이다.

또 한 부류는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가 ‘심판받을 죄인’임을 아는 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여기 해당된다. 이들은 소위, ‘율법의 몽학적 가르침(tutorial teaching of law)’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율법아래서 도망쳐 나와 그리스도께로 간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가 있다. 그들은 ‘죄인이라는 의식’도 없을뿐더러(있다 해도 ‘생득적인 양심법’에 근간한 추상적인 개념이다), ‘율법을 이루려는 의지’도 없는 소위 ‘무의식적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이다. 이방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의 무지가 ‘율법의 정죄’를 모면하도록 해주진 않는다. 예컨대 도로교통법을 몰라 교통법규를 어겼다고 범법자가 안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율법을 자각하던 못하던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자신들이 ‘율법의 정죄’ 아래 있음을 알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죄 사함’이 그 뒤를 따른다. 이는 피의자가 먼저 형의 확정을 받은 후에, 사면(赦免)을 받는 세상 법 원리와 유사하다.

죄인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선언적 선고(declaratory judgment)’를 수납한 후, 그리스도께로 가서 사면(赦免)을 받는다. 자기가 죄인임을 수납하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는 사면하지 않는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는 죄인을 건져내는 길은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은 당신의 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선언적 선고(declaratory judgment)’를 해주는 일이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려주는 것이다.

‘복음 전도’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말은 ‘당신은 율법의 심판아래 있으니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도망쳐 구원받으라’라는 뜻이다.

◈죄인의 의, 믿음의 의

죄인이 율법 아래서 속량(redemption, 贖良)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믿음의 의(義)’를 가짐으로서이다. 죄인이 자력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어 ‘율법의 속량’을 받으려 하면, 오히려 자신을 율법 아래 고착시킨다.

죄인이 율법에서 속량 받는 것은(갈 3:13)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취함으로서이다. ‘죄인의 의’를 ‘믿음의 의’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한 반면, ‘의(義)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은 것에서도(롬 9:30-31) 확증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는, 죄인이 그리스도가 대신 받은 율법의 저주를 통해 율법에서 속량 받는다 는 말이며, 그것은 믿음을 통해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의’는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의 의’와 조금도 차이가 없다. 전자의 원천이 후자이기 때문이다.

성경도 ‘믿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동일시했다(롬 3:22). 이는 ‘믿음의 의’가 그리스도가 ‘율법의 의’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라면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의 의’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취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직접 주시지 않고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것(요 5:26)과 같은 맥락이다.

‘율법의 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걸맞는 ‘의인의 의’라면, ‘믿음의 의’는 죄인에게 걸 맞는 ‘죄인의 의’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의인의 의’인 ‘율법의 의’가 아닌, ‘죄인의 의’인 ‘믿음의 의’를 약속하셨다.

죄인이 ‘의인의 의’인 ‘율법의 의’를 취하려는 것은 분수에 지나는 일이다. 이 분수를 망각할 때, 이스라엘처럼 된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 9:30-31)”.

오늘도 이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분수에 맞지 않게 ‘의인의 의’인 ‘율법의 의’를 추구하다가 ‘죄인’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분수를 아는 우리는 ‘죄인의 의’인 ‘믿음의 의’를 추구하여 ‘의인’으로 올라선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