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시선을 놓칠 때,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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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작가의 독서노트(4)] 내게 무해한 사람

떠난다고 생각하고 떠난 게 아니었는데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가 보았을 땐 어느 것 하나
그 시절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나 자신에게 조금 관대해지고 싶다
남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 문학동네 | 325쪽 | 13,500원

지난해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로 단숨에 주목받은 이정일 교수님이 2021년 ‘책 읽는 그리스도인’으로 격주마다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책은 크리스천투데이 ‘올해의 책’에 선정됐습니다. 이정일 교수님은 신앙과 묵상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인문학 책을 중요한 인용과 함께 소개하며, 부드럽지만 깊이 있게 생각할 부분들을 정리해 주실 것입니다. 교수님의 안내에 따라, 2021년 우리 함께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어 ‘책 읽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편집자 주

오늘 읽으려는 소설은 『내개 무해한 사람』이다. 최은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책이 2018년에 나왔고, 전작 『쇼코의 미소』는 2016년에 나왔다.

이 두 권의 소설집으로 작가는 독자들 사이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많은 독자들이 지켜보고, 또 다음 작품이 나오길 기다리는 작가가 되었다.

삶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인데, 이것을 배우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 이것을 나는 7편의 단편을 읽으며 확인한다. 독자들 역시 7편의 단편 중 어느 하나라도 읽게 되면 느끼게 될 것이다. 지날 때는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안다. 한 사람이 어른이 되기까지 그의 뒤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장소가 필요한가를.

식물의 미덕은 자기 자리에 머무는 것이고, 동물의 미덕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이다. 그럼 인간의 미덕은 무엇일까?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각자의 삶에는 신이 정한 자기만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주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는 7편의 단편 중 두 개만 골라서 읽으려고 한다.

모래로 지은 집

이 단편은 모래, 공무, 나비라는 세 명의 인물이 얽힌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두 20대 초반이고 대학생이다.

화자는 나비이다. 닉네임이다. 화자인 ‘나’의 실명은 선미, 모래는 은아, 공무는 현우이다. 작품 속에선 주로 닉네임으로 불리지만 어떤 돌발 상황, 곧 그들이 현실에 부딪쳐깨져나갈 때 이름이 불려진다.

읽다 보면 내가 나비이고 모래이고 은우가 되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지나온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청춘은 20대 ‘민증’에 찍힌 나이인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청춘은 서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이 그런 느낌을 준다.
이야기가 종결될 때 보면, 화자의 나이는 35세이다(181쪽). 세 인물의 첫 만남이 시작된 지 15년이 흐른 뒤이다.

이들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삼년 내내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서로의 얼굴이나 실명은 모른다. 그저 같은 천리안 동호회 멤버였기 때문이다. 정모가 없어 서로를 알 기회는 없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시솝(온라인 동호회 관리자- 편집자 주)이 동호회 폐쇄 공지를 올렸다. 그때 공무가 정모 한 번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이 처음으로 만났다.

만나고 보니 모래와 나비는 중학교 동창이다. 나비는 희미하게 한 장면을 떠올린다. 주번 조례에 늦어 교사에게 뺨을 맞았는데, 유독 한 아이만 울었다. 바로 모래였다. 그 아이는 엘에이(LA)에서 전학 왔다.

공무는 가족에 대한 진한 아픔이 있다. 진급에 실패해 전역한 아버지와 고시에 실패한 형이다. 형은 분노를 동생에게 풀고, 어머니는 무기력하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공무가 고등학교 때 올린 글―‘왜 병든 사람들이 가족을 만드는 걸까’(109쪽),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120쪽)―의 의미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모래는 두 친구와 다르다. 아빠가 의사여서 사는 게 여유롭다. 하지만 화자의 눈에 모래는 온실 속 화초처럼 보였다. 그 애는 지하상가에서 산 삼천 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편의점에서 파는 로션을 발랐지만, 그런 모습을 화자는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와 표정이라고 여긴다(118쪽). 반면 나비의 삶은 힘들었다. 보라.

“그때의 나는 내가 졸업 이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잡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가며 대학원에 입학하게 될 것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연애를 하고, 졸업과 취직을 하고, 오래 연애한 남자와 파혼하고 한동안은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리라는 것도 몰랐다.”(175쪽)

화자는 자신도 공무도 모래도 어떤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넌 것처럼 느낀다. 그러고 보니 다리의 끝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다.

서른 다섯이 되었을 이제, 공무는 어쩌면 열차기관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모래는 엘에이에서 지내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들이 다시 연결될 것이라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화자인 ‘나’는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해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생각한다(181쪽). 세 인물들은 겉으로 보기엔 타인이지만, 이야기를 다 읽었을 때는 같은 인물처럼 느껴졌다.

서로에 대한 관심은 자기중심적 관심이다. 어른이 될 때 나타나는 소외와 분리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서로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다.

아치디에서

「아치디에서」는 브라질 청년 랄도의 이야기다. 화자 랄도의 기억은 스물다섯살 때부터 시작된다. 한 여자에게 반해 무작정 아일랜드까지 찾아갔다. 헌데 난데없는 방문에 문전박대를 당한다.

귀국해야 하는데 이웃 나라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발이 묶였다. 공항은 폐쇄되고 카드가 정지되어, 어쩔 수 없이 시골 과수원에 취업을 한다.

소설의 줄거리는 하민이라는 여자와 함께 흘러간다. 한국에서 왔다. 전직 간호사이고 아일랜드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준비 중이다. 지금은 더블린에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아치디에서 8마리의 말을 돌보는 일을 한다. 랄도와 하민은 영어 말하기 모임에서 만나 친해졌다. 둘은 조금씩 친해지면서 자신의 삶을 조금씩 털어놓게 된다.

랄도는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241, 277쪽). 대학을 중퇴한 뒤 대마초에 취해 비디오 게임이나 하면서 말이다. 카드가 정지된 것도 엄마와 누나가 랄도를 뒤치다꺼리 하는 데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민의 삶은 랄도와 정반대였다. 하민에게 삶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275쪽).

하민은 자신이 병원에서 만난 한 간호사 이야기를 했다. 그 간호사는 호스피스 환자들 틈에서 일했는데 어떤 경우에도 환자와 감정을 섞지 않았다. 환자가 죽어도, 배변 주머니와 오줌줄이나 주삿바늘을 뺄 때도 말이다. 다른 간호사도 그 간호사에게 예의바르게 대했지만, 알고 보니 그 간호사를 향해 세운 벽이었다.

그 간호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일랜드로 왔다.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했던, 동료들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그 간호사는 바로 하민이었다. 하민도 지쳤던 것이다.
숨을 쉬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그녀가 자주 추웠던 것도 마음이 추웠기 때문일 것이다(280쪽). 동생이 하민에게 말했다.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282쪽)

이 한 마디가 하민의 삶에 숨구멍을 틔워주었다. 한 때는 수간호사를 꿈꿨지만, 삶은 단 한 순간의 미래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래서 아일랜드로 건너왔다. 말을 돌보면서 추운 날 온몸으로 비를 맞는 말이 오래도록 하민의 마음에 남았다(287쪽). 아마도 그 말이 자신인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287쪽).

인상 깊은 문장들

단편 「그 여름」에서 보면, 이경이 예전 일을 회상한다. 작가는 강을 따라 돌고 돌아가던 길에서 나던 “물냄새와 풀냄새, 오래된 스쿠터의 엔진 소리와 자신의 허리를 깜싸안던 따뜻한 팔의 감촉, 합숙소 근처까지 오고서도 아쉬워서 스쿠터에 앉았다 내렸다는 반복하던 수이”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장면하는데, 시선이 섬세하고 깊다(17쪽).

이런 섬세한 시선은 「모래로 지은 집」에도 나타난다. 나비(선미)는 휴가 나온 공무(현우)와 함께 부암동을 지나 백사실계곡으로 간다. 계곡에 앉아서 둘은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때 작가는 “비를 맞은 낙엽이 흙에 섞이는 냄새를 맡았다”(158쪽)고 묘사한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작가는 책의 귀퉁이를 접듯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섬세함은 모래가 나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반복된다. 이 편지를 읽으며 나비는 처음으로 자신이 모래를 오해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편지를 읽고 나니 이전에 보였던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걸, 자신에게 실망을 주었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모래는 이런 말을 나비에게 남겼다.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179쪽)

▲ⓒ문학동네

▲ⓒ문학동네

특히 마지막 문장―“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은 한참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문장은 우리가 그동안 놓치면서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똑같은 실수가 「아치디에서」도 반복된다. 작가는 하민을 바라보는 랄도의 시선을 통해 이것을 보여준다.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274쪽)

최은영은 소설집 속 곳곳에서 삶은 매일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를 회상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만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의 상처에도 눈을 들지 못하고 남의 상처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무해한 사람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남는 생각들

『내게 무해한 사람들』 속 단편들은 얼핏 보기에 다 다른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읽다 보면 이 7편이 하나의 줄기로 엮어지는 걸 알게 된다. 모두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은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삶의 어느 지점에서 마음이 아프고, 끊어지고,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진짜 삶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7편 중 특별히 함께 묶어서 읽은 두 작품―모래로 지은 집, 아치디에서―을 읽다 보면, 누군가와 시간을 나누고 삶의 경험을 나눈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모두 서툴고 어설펐던 실수를 하던 주인공들이 어느새 성숙해져,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나도 나에게 물어본다.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라고 말이다.

「모래로 지은 집」에서 작가는 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미숙하고 바보 같은 실수를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실수해도 괜찮아,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아, 우린 모두 실수를 하면서 지금의 내가 되는 거야.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상처를 받으면서 성숙해가잖아’ 라고. 그래서 그런 삶을 읽는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다.

주인공들은 관계의 균열에 아파한다. 대개는 작은 오해로 인해 생겨났다. 때로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행보 때문에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뒤늦게 이를 깨닫고 안타까움에 아파한다.

그리고 결국엔 잊히지 않는 슬픔이 남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못한다.

전작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는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는 내내 여운처럼 마음에 남았다.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나도 깊은 잔상을 마음에 새기기도 한다는 걸 배운다.

마음이라는 게 ‘문’처럼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다면, 상처는 쉽게 치유될지도 모른다. 만일 인간이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운 존재가 될까?

단편들 속 인물들의 삶을 읽다 보면, 나 자신에게 조금은 관대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관대함을 내가 먼저 가져야 남에게도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기에.

▲이정일 교수. ⓒ크투 DB

▲이정일 교수. ⓒ크투 DB

이정일 교수
미국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를 받았다. 신학을 하기 전엔 영문학을 공부해 문학박사를 받았다. 박사 후 뉴욕주립대 영문과에서 미국 현대시를,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제3세계 작가들을 연구했다. 대학에서 세계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전방 포병대대 교회에서 군(軍)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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