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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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녀관(淫女観)’의 왜곡된 적용

지상의 모든 제도와 조직의 배후에는 그 조직의 정신 속에서 역사하며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적 세력이 있다. 교회 조직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과 미주 한인 교계에 오랫동안 역사해온 뿌리깊고 편만한 영적 세력은 사역의 현장에서 왜곡되게 적용되어온 성경적 ‘음녀관’이다.

성경에서 ‘음녀’에 대한 언급은 잠언에 나오는 언행이 음란하거나 평범한 이웃 여자나 이방 여인으로 인한 이스라엘 남자의 부도덕한 죄악, 민수기에 나오는 바알의 이교 제사에 참석하고 이방 여인과의 음행한 이스라엘 남자의 죄악,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섬기게 만든 아합의 왕비 이세밸 왕비의 죄악, 호세아서에 나오는 인애한 지아비를 반복해서 배반하는 창녀 고멜의 죄악,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의 세력을 상징하는 큰 바벨론의 멸망을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한다.

성경이 굳이 세상 속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켜 멸망케 하는 영적 실체의 주체를 ‘여성성(女性性)’으로 상징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나 남편 혹은 청년과 같은 ‘남성성(男性性)’으로 의인화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사 54:5-6; 62:4-5).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성품을 공유하신 하나님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성’으로도 표현되었다(사 66:13). 예수 그리스도 또한 남성의 모습으로 오시었으므로 성경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부’(계 19:7; 21:2)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생을 바라보실 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상의 영’과 싸우는 ‘신랑 하나님의 신부(사 62:4-5)’로서의 정체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부득불 대쳑점에 있는 ‘세상의 영’에게 ‘여성성’을 적용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상 일상적 실례에서 ‘호세아의 처 고멜’ 외에 여성의 음란성, 즉 음란적인 직업이나 행위등을 문제시한 내용보다는(창녀 라합, 간음하다 잡힌 여인, 수가성의 여인,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 오히려 여성의 ‘성’이 남성에 의해 유린된 사례(세겜의 야곱의 딸 디나와 암논의 다말 강간 사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의 음행건, 다윗의 밧세바와의 동침등)를 크게 문제 삼고 있다.

사실 ‘창녀’라는 직업의 존재는 공범인 남성의 존재를 필히 전제한 것이기 떄문에 단지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 ‘창녀’를 부도덕한 여성만의 직업의 대명사로 지칭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여성에게 늘 ‘창녀 출신’ 운운 하는 것은 차별적 표현으로, 어떤 남성에게 늘 “창녀 상대 출신’ 운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간음이나 다수의 결혼 이력도 남녀 공히 해당되는 것이다.

성경이 유독 ‘고멜’에게 예외적으로 진행적인 음란성을 적용한 것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을 주인 삼는, 생래적으로 음란한 세상의 남녀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공감적으로 깨닫게 하심이다.

이들을 징벌하시더라도 결국은 연민으로 타이르시고 위로하셔서 결혼한 남편처럼 사랑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이다(호 2:16-20).

그러므로 전자의 경우 수용과 용서와 연민의 주문이 따랐던 반면, 후자의 ‘성폭력’ 경우엔 큰 환난과 멸망으로 죄값을 치룬 사례가 압도적이다.

남녀 속 ‘음녀’를 향한 복음과 심판의 메시지

이와 같이 성경은 특정 여성이나 일반 여성에게 음란성(淫亂性)을 지우거나 부각시키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라, 이들의 곤궁함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남녀 성을 초월한 인간 일반 내지 종교적 기득권자의 편견적 죄성을 부각시키고, 이 죄를 용서, 화해,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복음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있다.

반면 ‘일반 성폭력’이나 목회자의 ‘그루밍 성폭력’ 케이스는 남성의 힘에 의한 강제나 지위나 신분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예속된 위치에 있는 여성과의 친밀감을 통해 심리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안엔 용서나 화해와 ‘구원의 메시지’가 아닌, 불의한 가해자에 대한 질타와 벌칙 등 ‘심판의 메시지’를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한인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생겨나고 있다.

많은 남성 목회자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나 ‘수가성 여인’에 대한 말씀의 본의를 깨닫지 못하고, 주인공 여성을 음란시하는데만 집중하여 묘한 집단 관음증적 무드를 만들고들 있다.

‘간음하여 잡혀온 여인’을 말함에 있어선 성경을 모르는지, ‘간부(姦夫)’의 행방은 간단히 함구된다(레 20:10; 신 22:22). 아마 예수께선 그 시간에 잡혀온 여인의 죄보단 달아난 간부와 여인을 끌고와 둘러싸고 있는 기세등등한 남자들의 죄성을 먼저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또 ‘수가성의 여인’에 대해선 거의 유독 인적이 드문 시간이라는 둥 지엽적이고 애매한 추측에 의존하여, 정작 핵심은 간과한 채 여인의 평판을 깎아내리는데만 과도한 열심을 보일 뿐 아니라 남편이 다섯이란 대목에선 이 여인의 음란성의 결정적 증거라도 잡은양 기염을 토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선입견 없이 읽어보면, 이 말씀의 중점은 한국의 뭇 남성 목회자들이 갖는 어떤 한 여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염탐적 호기심과는 무관하게, 주님께서 제자들이 없는 동안 열려진 공간에서(open area) 단독으로 이 여인을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를 하심으로써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주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적 인격으로 예의 바르게 한 여인을 대하셨다. 주님께서 여인의 남편을 언급하신 것은 이 여인의 음란성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인이 살아온 인생의 곤궁함에 대한 공감과 연민에서 우러나온 말씀이었다.

누구든 대상에 대한 진심어린 연민 없이,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당시 시대적 정황이 남편이 아무 때나 빌미를 잡아 아내를 버리고 여성을 가축의 값보다 더 싸게 취급할 때인지라, 다수의 남편을 가졌음이 여인의 음란성에 기인한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사실 남성이 아닌 여성에 있어 결혼 횟수는 음란의 이슈와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경우 한국의 어떤 남성 목회자들은 이 말씀을 암암리에 상투적인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음녀관적 편견으로 삼거나, 심지어 교회 내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2차적 음해성 용도로까지 애용하곤 한다.

오죽하면 다윗의 성폭행 피해자인 밧세바에게도 음란성을 뒤집어 씌우지 않았던가?

‘그루밍 성폭력’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마땅한 대처

이런 현상이 만연한 배후에는 한국과 한인 교계를 막론하고 교회내 성폭력 문제를 제대로 치리하지 않은 교회 내 조직의 책임이 막중하다.

최근 ‘뉴스앤조이’에 실린 ‘그루밍 성폭력’에 대한 기사를 보고, 필자는 20여년 전 미주 한인 교회에서 목도했던 성폭력 사건의 정황과 현재의 한국적 상황이 너무도 유사한 것을 보고, 이에 대한 인식의 재환기와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전격적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①목사의 여교인 성추행 건은 보고 즉시 다른 정황을 고려할 것 없이 집사회나 당회 등 소속 교회 지도부와 노회, 그리고 교단 차원에서 엄중한 조치를 즉각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슈가 거론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분히 혐의를 둘 만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 확인을 이유로 성추행에 관한 보고를 받은 교회나 목사회나 교단 측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거나 심지어 재발 때까지 미루겠다는 태도는 교인에 대한 책임을 회피, 묵인, 방조하는 무기력한 기독교 내 조직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다.

②집사회나 당회, 노회, 교단은 ‘가해 목사’를 바로 ‘정직’시키고 ‘가해 목사’의 ‘목회 활동 전면금지’와 피해자(들)와 교인들과의 ‘사적인 소통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도록 철저히 격리시켜야 한다. 가해 목사의 혐의가 인정될 경우 ‘퇴출’과 동시에 반드시 ‘공개사과’를 시키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

③‘피해 교인/부교역자’는 ‘가해 목사’에 대해 일체의 동정심이나 용서의 의무감을 갖지 말아야 하며, ‘가해 목사’쪽에서 사모를 언급하며 도움을 청하거나 ‘피해자’를 위해서라며 해당 교회를 떠나라고 달래는 등의 회유책에 넘어가지 말고 전화나 만남을 거절해야 한다.

사모에게 남편인 목사의 성추행 사실을 바로 알리는 것이 사모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안 그럴 경우 목사와의 은밀한 관계를 숨기고 있는 제3의 인물(들)이 있거나 추후 목사의 상습적인 부도덕적 행위가 지속되는 경우 이로 인해 암암리에 사모가 받는 고통이 지속되어,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 2, 3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가해 목사가 피해자에게 가하는 ‘2차성 가해’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엄청나게 크다.

교계에 이미 인맥이나 학맥을 구축한 목사는 자신의 허물을 줄이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피해 교인(들)’을 모함하고자, 사모까지 동원해서 교인들은 물론 친분 있는 목사들을 비롯해 본인의 소속단체와 모든 사회적 네트워크망을 통해 ‘피해자 험담’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 일은 아마도 그가 세상에 존재할 때까지 지속될지 모른다.

피해자가 가해 목사의 공개 사과를 요청하기 위해 가해 목사와 피해자 양측을 아는 혹은 가해 목사와 연계된 남여 목사들에게 상담이나 도움을 청하더라도 기대하지 말 것은, 그들이 교단이나 목사회 조직의 기성 멤버로서 이미 친분이 있는 가해 목사를 더 동정하거나 신뢰하여 피해자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데 일조하기 떄문이다.

물론 피해자가 공개 사과를 요청하는 이유는 처음엔 공론화를 꺼려 조용히 감내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가해 목사가 피해 교인의 선의를 역이용해 지속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나 교단은 양측의 말이 다르고 가해 목사가 피해자와의 만남을 회피할 경우엔, 강권적인 맞대면을 추진하거나, 가해 목사가 불응시 피해자의 말에 신뢰를 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피해자를 제3자에게 음해하려는 자는, 절대로 제3자 앞에서 당사자와 만나 사실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피해자에 비해 월등히 우세한 자신의 인적 자원을 믿고 일방적으로 돌아다니며 악소문을 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 있는 목사나 교회라면, 친분이 있는 이로부터 들은 어떤 이에 대한 인신공격성 내용에 대해 사실 확인없이 타인에게 퍼뜨리는 ‘카더라’ 식의 무책임한 ‘거짓 증거성 험담’의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비록 교회에서 성폭행 때문에 강제 퇴출된 목사라도 한국/한인 목사들은 미국의 목사들과 같이 양심적으로 자원해 자신의 죄에 대해 공개 사과를 하고 깨끗이 물러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공개사과 제도 도입 등 교회 내 조직이나 교단적으로 철저한 후속 규제가 이어지지 않는 한, 도리어 피해자에게 앙심을 품고 자신의 위상을 만회하고자 계속적인 ‘2차성 가해’를 행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피해는 ‘피해자’와 그 가족이 교회 생활을 지속하거나 사역을 하고자 할 경우, 안수를 받을 때나 개척 교회등 사역을 시작하는데 있어 가해 목사가 퍼뜨린 악선전 땜에 큰 훼방을 받게 된다.

피해 여성이 교역자인 경우, 사역을 방해하는 다른 남성 목사들이 구실 삼는 것은 의외로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법적 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자기들도 가해자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한인 교회의 현 정황상 필자는 목회자의 교인에 대한 성범죄만큼은 교회와 피해자 측에서 적극적으로 세상의 법정에 맡기는 것이 목회자 성범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피해자와 그녀의 사역을 보호하며 교회 사회 쇄신을 위해 최선책이란 결론을 내린다.

‘그루밍 성폭력’의 현주소

상기한 기사의 내용을 보면-왜 교인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느냐는 피해자 질문에, 이 목사는 피해자들 이름을 언급하며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너희들은 괜찮겠니? 너희들 여성으로서 괜찮겠냐고”라고 말했다-라고 한다.

왜 가해 목사가 피해자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정녕 ‘여성인 너희들’을 걱정하는 목사가 ‘여성인 너희들’을 가해했겠는가?

가해 목사가 사건 후 당당히 피해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필자가 전술한 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음녀관적 편견’을 가진 한국 교계의 분위기의 ‘빽’을 믿기 때문이다.

즉 성추문이 일어날 때마다 여성이라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해 은폐되어 왔기 때문에, 많은 가해 목사들이 상습적으로 그런 일을 하고도 문제가 노출이 되면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거나 뉘우치기는커녕, 천연덕스럽게 본격적으로 ‘피해 여교인’을 제멋대로 음해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 여성으로서 괜찮겠냐”는 가해 목사의 말은 다분히 여유로운 협박성 멘트인 것이다.

양심 있는 목사라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피해자는 절 믿고 순종한 것 외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교인의 아픔이 치유되도록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이끌어줘야 할 제가 도리어 심신뿐 아니라 큰 영적인 상처를 주게된 것을 진심으로 회개합니다”라고.

이러한 문제를 방조하는 한국/한인 교계는 세상 기준보다 열등한 도덕 집단으로 간주되고도 남는다.

‘공개 사과’를 요청했을 때 ‘미주 한인 교계’에서 생긴 일

필자는 20여 년 전 최근 뉴스화된 ‘그루밍 성폭력’사건과 아주 유사한 정황에서 한 ‘피해 여성(나중에 교역자가 됨)’이 미주 한 ‘목사회장’에게 서신을 보내 가해 목사의 공개 사과를 요청하였을 때, 서신을 받은 ‘목사회장’이 한 행동을 보았다.

그는 피해자에게 답장도 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아는 어떤 여목사를 이용해 피해자를 회유, 피해자가 오랜 기간 참석치 않았던 교단 총회에 참석케 하였다. 총회 순서중 별안간 피해자의 눈 앞에 그녀가 서신을 보냈던 목사회장이 강대상 위로 깜짝 등장한 것이었다.

교단이 달랐던 그 목사회장은 피해 여성을 주시하며 용서 운운하는 내용의 설교를 하면서 가해 목사의 공개사과를 대신하고자 하는, 어처구니 없이 무례한 촌극을 벌였다.

피해자로선 가해 목사를 참석시키지도 않은 채 많은 남성 목사들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또 다른 ‘성폭행’을 당한 느낌이었다. 중간에 회의장을 뛰쳐나온 피해자에게 자존심이 상한 목사회장은 또 다른 엉뚱한 계획을 구상했다.

어느 날 미주 목사회는 한국의 유명 부흥사를 초대하고선, 여 목사(B)를 시켜 피해자의 집에 아침부터 빗발치는 전화를 걸게 했다. 그즈음 B는 이상하리만치 전과 다른 태도로 피해자에게 나날이 큰 친근감을 보이던 차였다.

그런 B가 애걸하다시피 남편과 함께 꼭 참석해달라고 졸라서, 피해자는 목사회를 간다는 게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을 어렵게 설득해 모처럼 심기일전의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부흥회장에 참석했다.

그런데 부흥회장은 B의 말과 다르게 의외로 썰렁했다. 부흥회를 개최했다는 목사회장을 비롯한 임원들 다수와 가해 목사는 참석치도 않은 채, 소수 목사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부흥사의 설교 내용은 주로 여성의 ‘음녀성’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고, 끝에 가선 “아 이거 목사들 이게 다들 형편없어 이거 다들 문제들이야!”라고 양심선언성 멘트로 마무리됐다. 이는 가해 목사를 ‘싸고도는 목사들’이 피해자의 가정에까지 행한 ‘2차 가해’의 예이다.

또 필자는 한국에서 목회에 성공했다고 알려진 어떤 목사가 당시 미주 한인 교회들의 연이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즈음 공식 전도 대회에 초청돼서, 설교 중 “여자들이 암내를 피우는게 문제야 문제…” 하며 멋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을 들었다.

필자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들리는 소문은 재정적으로 넉넉한 그 “암 냄새” 목사는 성추문을 일으킨 어떤 목사의 ‘광팬’이 되어 늘 선교지마다 대동하고 다니며 여일같이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주 한인 교계와 한국 교계의 현주소가 이러할진대, 그 얼마나 ‘값싼 은혜’의 천박한 풍경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들이 유람하듯 즐기며 돌아다니는 선교의 정황을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보실까?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부유한 은혜의 특혜를 누리는 금수저들인가? 결국 가해 목사에게 그 개념 없는 목사가 퍼붓는 물질은 피해자와 같은 양떼들의 입장인 ‘교인’들의 헌금이 아닌가?

‘그루밍 성폭력’은 한국판 ‘음녀’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감수하는 것이 더 이상 용인되어선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에 더 관심을 두시기 때문이요, 한국/한인 기독교를, 교회를 살리기 위함이다.

가해자들 중엔 2-3대에 걸쳐 목회자의 가계를 지닌 이도 있을 것이고, 모태신앙인도 많을 것이다. 아무튼 저들은 피해자에 비해 이미 세상에서 먼저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을 맛보고 누려온 자들이다.

반면 저들이 섬겨야 하는 교회는 고단한 삶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온 수가성 여인,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 같은 남녀들이 오는 것이 당연한 곳이다. 성경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요(눅 12:48)”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든, 모름지기 교회에선 이들 모두가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 목자를 따르고자 하는 순수한 양들이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심에 있어 이들의 세상적 이력이나 자격을 결코 문제삼지 않으셨다.

주님이 정작 문제 삼으신 것은 옥합을 깨고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이 아니라, 기득권과 자기추구적인 바리새인적 자만이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화 하는 종교적 권력이었다.

오늘날 한국/한인 교회사회의 또 다른 음녀는 누구인가? 오랫동안 사역 현장에서 왜곡된 채로 부적절하게 적용되어온 한국적 ‘음녀관’을 등에 업고, 종교 권력과 결합한 이들이다. 또 공개 사과하지 않는 ‘성추행 목사’와 이를 ‘감싸고 도는 목사’들도 이에 해당된다.

싸고 도는 목사들의 심리는 다름 아닌 가해자인 목사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남성 우위적 오만이거나, 가해자가 목회 연륜, 실적, 명예 등 이력상 피해자보다 잃을 게 더 많다고 동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런 이들의 목회철학 기준은 ‘한 영혼’의 귀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가치를 우선시한 ‘자기추구’에만 있으므로, 이야말로 철저히 ‘음녀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음행’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권력, 명예, 재물, 성(쾌락)을 사랑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우상숭배’적 사고를 말한다.

삯군적 성향이 농후한 가해 목사들은 부교역자를 철저히 도구화하고, 심지어 자신을 의롭게 보이고자 자신의 기독교적 가계나 신앙적으로 살아온 과거의 이력을 의도적으로 선전하는가 하면, 자신의 사역을 과도하게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걸핏하면 세우기 좋아하는 미국 자매결연 신학교들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학위장사니 하는 소문이 나돌겠는가? 이에 부응하여 얼마나 많은 남녀 목사들이 세상에 보이기 위한 그럴싸한 이력을 만들기 위해 기본적 학문적 소양이나 자세도 없이 손쉽게 신학 박사니 교수니 하는 레테르를 붙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학과 신앙의 품위를 훼손하는가?

그러므로 신학교는 선택에 있어 매우 신중해야 한다.

매년 신학생을 이끌고 수십 차례 성지순례단을 인솔했던 한 목사는 일생 처음 감격스레 성지순례를 가게 된 한 여학생을 상대로 이집트에 도착한 첫날 교묘한 수법으로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 직후 그 가해 목사는 성지순례에서 돌아오자마자 버젓이 성지순례에 대한 자신의 책을 서둘러 출판했으며, 교회에서 퇴출되고서도 바로 그 이듬해부터 보란듯이 매년 성지순례단을 당당히 인솔했다.

피해 여성은 순례 기간 내내 또 돌아온 후 한참동안,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성지순례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눌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암울함과 억울함과 영적 비통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소시오패스 목사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맺음말

정인이의 조그만 몸통 곳곳에 박힌 검푸른 멍자국이 떠오를 때마다, 필자는 정인이가 늦게 자는 아기인데도 불구하고 양모가 초저녁부터 몇살 위 언니와 함께 정인이를 방에 넣고 돌보지 않았다는 증언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매인다.

그 철모르는 정인이 언니는 아마 말 못하고 걷지 못하고 누워있는 무력한 정인이 몸통 위에 올라서서 깡총깡총 밟으며 신나게 수시로 뛰고 놀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어린 정인이가 느꼈을 공포스럽고 숨막히는 아픔과 괴로움…, 점점 잦아들었을 생명의 빛…, 그 전적 책임은 물론 철모르는 어린애인 정인이 언니가 아니라, 그와 같은 상황을 방조하고 돌보지 않은 양모의 책임이다. 따라서 정인이 언니 또한 애매한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대개 성폭행의 피해자 중엔 크리스천 공동체의 기도와 협조가 필요한 심적으로 연약한 형편에 놓인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위로하고 빛과 생명으로 이끌어야할 교회의 지도자가 이들에게 가한 상처는 회복하기 어려운 정인이의 상처 만큼 깊고 심각한 것임을 한국/한인 교회 사회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알뿐만 아니라 반드시 가해자로 하여금 ‘공개 사과’를 하게 하고, 교회 사회적 차원에서 속건제적 의미에 부합한 ‘배상’을 피해자에게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가는 등불도 꺼버리는 한국교회 현실을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보실까? 교회 내 ‘그루밍 성폭력’에 대해 뜻 있는 남여 교역자들의 각성과 대동단결이 절실한 한국 교계의 현실이다.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