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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8편 강해: 시편 중 가장 슬픈 시

요절: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10절)”

찬양 대장 헤만의 시입니다. 교훈적인 마스길의 시입니다. 마할랏르인놋의 슬픈 노래입니다. 시편 가운데 가장 슬픈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헤만은 슬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신앙이 없어 탄식합니다.

1. 구원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1-2절을 보면 헤만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의 열심히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헤만은 사단의 역사로 지금 고통이 있고 눌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사단보다 더 강한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단의 역사 위에서 일하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살아계셔서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를 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을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헤만은 자신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기도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구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주님이 다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기도한다고 부모가 다 들으시지 않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부모의 주권이고 긍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를 다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속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2. 나는 죽음에 가깝습니다

3-5절을 보면 헤만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합니다. 그의 생명은 스올(음부)에 가깝습니다. 그는 질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같이 사람들에게 여겨졌습니다.

그는 힘없는 용사와 같이 무력해졌습니다. 그는 죽은 자 중 한 사람처럼 무덤에 던져짐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무덤 속에 누인 자 같습니다.

헤만은 자신을 이야기하다가 비약하여, 그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주의 권능의 손에서 끊어진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도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무덤 속에 누인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자도 이런 죽음의 고통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좇겨나 생로병사와 기근과 전쟁과 자연 재해가 있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사단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3.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릅니다

6-8절을 보면 헤만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 속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헤만을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기 전 그를 죽이고자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는 물없는 웅덩이였습니다.

요셉에게 이런 것도 주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총리가 되게 하신 것만 주님이 하신 일은 아닙니다. 요셉이 웅덩이에 갇히고 노에가 되고 죄수가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욥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되고 부요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만, 욥이 재난을 당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의 지배 아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노와 주님의 모든 파도가 헤만을 심히 누르고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만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양들의 죄로 인한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연단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헤만이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헤만은 마치 벌레같이 되었습니다. 마치 치매에 걸린 자나 교통사고를 당한 자같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헤만을 아는 자를 그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가증스런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헤만은 깊은 골방에 갇혀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리 잠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독과 소외감에 사로잡혀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났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증히 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사흘 동안 갇혀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고통 중에 둘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4.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겠나이까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겠나이까?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9-12절)”

헤만은 곤란으로 눈이 쇠하였습니다. 사람이 기력이 쇠하면 시력도 쇠합니다. 그는 이런 곤란 중에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손을 든 것은 도움에 대한 간구요 주님께 대한 항복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왜 나를 버리시냐고 기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셨고 나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린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곤란 중에 주님께 나가서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헤만은 죽은 자에게 더 이상 기이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어서 유령이 되면 어떻게 일어나 주를 찬송하겠냐고 반문합니다.

그는 무덤이나 멸망 중에서는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선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흑암과 잊음의 땅에서 헤만은 주의 기적과 주의 공의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헤만은 죽기보다, 살아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좀 더 살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기적과 주의 공의를 알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좀더 잘 먹고 살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의 공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만이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일 수 없고 주의 기적이 없다고 한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는 부활의 신앙이 희미하였습니다. 이것은 헤만이 예수님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부활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 기이한 일을 행하사 부활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령들도 일어나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우리들이 일어나 부활의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무덤과 멸망 중에서 일어나 주님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5. 어찌하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십니까

13-14절을 보면 헤만은 다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아침에 주님께 기도합니다. 성전에는 제사장이 아침 저녁으로 분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그 시간에 맞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하고, 하루를 마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헤만의 기도를 들으시고 곧바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영혼을 버리시며 얼굴을 가리우십니다.

하나님은 잠시 버리시고 우리에게 얼굴을 숨길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이때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삼일을 인내하셨고, 아브라함은 25년, 모세는 40년을 인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잠시 얼굴을 가리시지만 반드시 다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6. 내가 어릴 때부터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15-18절을 보면 헤만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예기치 않게 두렵게 하실 때가 있어 당황하였습니다.

주님의 진노와 주님이 주시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어려서부터 고난을 주십니다. 젊어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나 요셉이나 어려서부터 고난을 받게 하셨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믿음을 연단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주의 진노와 두려움이 물같이 헤만을 덮었습니다. 종일 고통하였습니다. 그의 고통으로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다 떠났습니다. 그는 흑암의 사망권세 속에 있었습니다.

마치 욥이 고통 중에 싸여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자, 친구들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아내도 욥에게 욕을 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헤만이나 욥이나, 예수님이나 다윗이나 요셉이 당한 고난은 고난 받는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헤만은 부활신앙이 희미했습니다. 우리는 헤만의 신앙에서 더 나아가, 고난 중에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오요한 시편 역경 속에 피어나는 찬양의 꽃
▲오요한 목사.
오요한 목사
천안 UBF
성경 66권 유튜브 강해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