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 Nicodemus
▲헨드릭스 보마레인의 ‘Christ talking with Nicodemus at night'.
본문: 요한복음 3장 3절

주님과 니고데모의 만남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밤중에 니고데모는 주님과 단독 면담을 시도합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중 최고의 지성인입니다. 주님은 오랜만에 최고의 지성인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의 자리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배경을 중심으로 ‘니고데모의 반문’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3절)”.

1. 이해되지 않는다
논리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중생, 즉 거듭남에 대한 주님의 설명을 듣고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나오게 되는가요?”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그 유식한 사람이 너무나 이치와 상식에 맞지 않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거듭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승려가 말한 지혜의 말과 같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반문했습니다.

여기서 니고데모의 문제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신호를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은 “단어가 어렵다거나 논리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해란 분별하거나 해석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너무나 전문용어여서 모른다”는 말도 됩니다. 니고데모에게 문제는 논리로만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영적 특성을 논리적 특성으로 이해하려는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영적인 신호는 논리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신호를 맞추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실은 영적인 신호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2. 난해하다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는 말입니다.

3절에서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당황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얼른 되받아서 반문을 했습니다.

니고데모의 반문은 주님과의 두뇌 싸움에서 역부족으로 밀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낭패감에서 엉겁결에 한 반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일학생이 들어도 웃음이 나올 만한 우매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의 문제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영적인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서 그의 질문에 대해 비웃거나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분위기로 봐서, 그의 질문 속에는 어떤 냉소적인 요소가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자못 진지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질문 속에 우리에게 계시하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경험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니고데모는 덕망이 높은 인격자입니다. 학식이 많은 이름이 난 가문 출신의 지성인입니다. 경륜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입니다. 권세 있는 높은 지위의 엘리트 고급관리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영적 경험이 없었기에, 영적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자기의 경험 안에서만 질문하고 이해하는 존재입니다. 독일에는 “경험은 가장 좋은 교사이다. 다만 수업료가 너무나 비싸서 유감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제 니고데모가 주님의 거듭남을 이해하기 위해 “영적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3.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
정말 알고 받아들이고 싶다는 말입니다.

3절 속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을까요?”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던 니고데모가 동정이 가지 않나요?

니고데모는 중년을 지난 초로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만한 학식 위에 영향력 있는 사회적 지위와 인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런 위치에까지 오르려면, 아무리 뛰어난 천재여도 결코 짧은 세월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황혼에 찾아온 초로의 신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니고데모가 인생의 황혼쯤에 주님을 만난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그리고 그 나이가 되도록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곤혹스런 모습도 보아야 합니다.

이제 니고데모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은 영적인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ad 155-240)은 “논리가 아닌 것을 따지지 말고 믿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논리적인 것이면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논리가 아닌 것은 믿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니고데모는 영적인 일을 믿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믿음을 사용하여 “영적인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사람은 많이 배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말합니다. 지식의 세계가 너무나 넓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 살면서 영적인 일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믿음의 신호를 맞추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영적인 경험을 갖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세상에 살면서도 믿음의 신호를 갖고 주님과 소통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