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찬송가 캡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홀로 집에서 지내는 동안 <찬송가>(한국찬송가공회, 2006)에 담긴 노래들을 열심히 불렀다. 성경을 통독하듯 찬송가를 큰 목소리로 통송했다. 찬송은 언제나 나에게 은혜 충만을 선물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예배 때 부르는 회중 찬송으로 합당하지 않은 곡이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한국 진보계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어둔 밤 마음에 잠겨(찬송가 582장)’이다. 성공회 성가집에도 수록되어 있다(568장).

이 노래는 찬송, 찬송가가 아니다. 찬송가 책에 담길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교회가 예배 중에 부를 회중 <찬송가>의 곡 선택을 정치적으로 하거나 탈기독교적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선정하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코로나 바이러스 위협 때문에 교회가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는 이 마당에 무슨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찬송가 타령’이냐고 질책할 분이 있을 법하다. 예배가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기에, 찬송가를 통송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또 독자들과 나눌 교회, 예배, 찬송, 신앙고백에 관련된 한 꼭지의 글을 쓰고 있음을 밝혀 둔다.

1. 김재준의 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

김재준 목사(1901-1987)가 작사하고 이동훈 선생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암울한 군사 독재정권 치하에서 역사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새 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했다. 한국 진보계 기독교권의 큰 사랑을 받아 왔다. 한국 <찬송가>에 수록된 노래들 가운데서 진보계 개신교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곡이다.

1절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 탑 놓아 간다

2절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3절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에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작사자 김재준은 한국의 대표 진보 신학자이다. 1940년 조선총독부 울타리 안에서 신사참배, 우상숭배를 마다하지 않고 충량유의한 황국(皇國)의 ‘교회사(敎誨師) 양성’이라는 목표로 시작한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1953년 독립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이끈 동력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제자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등 민중신학자들을 길러냈다.

위 시의 3절은 문익환 목사(1918-1994)가 지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구약신학자이며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성경’ 책임자로 활동했다. 1989년 대한민국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 문성모의 범주착각 오류

독일에서 예배학과 음악학을 전공한 문성모 박사는 김재준의 위 노랫말을 치하한다. “장공 김재준의 찬송 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 어둔 밤 마음에 잠겨 가사를 중심으로(<기독교사상>, 2017.3.)”라는 글에서, 위 시에는 그의 신학사상이 함축적으로 엑기스처럼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아주 훌륭한 찬송임을 전제로 하는 말처럼 보인다.

문성모에 따르면, 위 노래는 김재준의 수평적 사랑을 통한 수직적 하나님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다. ‘민족’과 ‘교회’는 김재준 신학사상의 두 축이다. 이 둘은 하나이며, 영원한 순례를 위한 동반자이다. “위를 향하여 끝없이 열려 있는 길을 가는 순례의 사상”, “긍정을 향한 끝없는 변혁” 사상을 담고 있다.

문성모는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교회음악 전문가다운 비평적 논의 대신, 김재준 삶의 족적을 위 노래 말에 대입하여 탁월성을 뒷받침하려고 시도한다.

위 ‘찬송 시’가 찬송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인지, 회중찬송으로 적합한지, 이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다루지 않는다. 언급하지도 않는다.

문성모의 논증과 추리는 범주착각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한다. 특정인의 훌륭한 삶과 사상이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의 탁월성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김재준의 삶과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신학사상이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쓴 위 ‘찬송 시’가 반드시 훌륭한 찬송가이며 예배 시간에 부르기에 합당한 회중 찬송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친다. 찬송, 찬솧가, <찬송가> 책에 담길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범주착각의 오류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 오류이다.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을 그렇다고 가정하고,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오류이다.

“신부님이 에이즈에 걸렸겠어?” “저렇게 돈 많은 사람이 고작 만년필 한 개를 훔쳤겠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 절대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어.” “예쁜 버섯에 독이 들어 있을 리 만무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월북자가 지은 동요는 악하다” 식의 논증이다. 김재준의 노래 글의 가치를 그의 삶과 사상에서 찾으면 오류 판단을 할 수 있다.

김재준의 삶과 사상의 위대성은 별도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다. 이 글이 지적하는 것은 김재준의 삶이나 신학의 탁월성 여부가 아니다. 문성모의 추론과 접근 방법이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장과 근거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작품의 위대성과 작가의 삶과 사상의 위대성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별개의 사안이다.

중요한 것은 위 '찬송 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3. 찬송, 찬송가의 조건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 이 곡의 가사는 찬송이나 찬송가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hymn)’이 아니다. 신앙고백과 기도를 담은 ‘찬송가(hymnal songs)’도 아니다.

교회, 신앙실천, 선교의 책임 등을 노래하는 복음송도 아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시작하는 애국가 정도의 고백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찬송가>에 포함되거나 회중찬송으로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다.

‘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리는 찬미의 노래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직접적 찬미이다.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영혼의 노래이다. 대부분 <찬송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찬송가’는 신앙고백과 기도를 담은 노래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고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찬송가>에는 성경적, 교리적, 신학적 검증 과정을 거쳐 확인된 것들이 수록된다.

개혁신학 전통의 유산 가운데 하나는 시편에 곡을 붙인 ‘시편 찬송’이다. 존 칼빈 시대의 제네바 지역 개혁교회가 불렀던 시편 찬송은 당대의 곡을 붙인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제네바 시편송(Genevan Psalter)’이다. 중세 동안 교회가 불러 온 ‘그레고리안 챈트’의 음조와 비슷한 멜로디를 수반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자라나 영국 국교회(성공회), 루터파 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동방정교회 예배 음악을 두루 접했다. 흑인영가와 트로트를 연상시키는 기도원의 뽕짝조 예배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을 접했다. 필자는 종종 복음송(gospel songs)을 즐겨 부른다. 6세기 만들어진 ‘그레고리안 챈트’도 즐겨 듣는다. 시편에 곡을 붙여 찬송하는 ‘시편 찬송’을 존중한다.

복음성가로 일컬어지는 현대 교회음악(CCM)은 신학적 검증이 필요하다. 찬송, 찬송가의 멜로디는 진리와 고백을 담는 그릇이고 다소간 당대 문화의 변화를 따르므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현대 교회 음악 가운데는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운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 곡들이 있다. 필자는 드럼, 기타, 피아노, 키보드 등을 일시에 사용하여 예배 참석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음악(音惡)에 거부감을 느낀다.

젊은이들은 현대교회 음악과 함께 춤추며 노래한다. 춤추며 찬양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넌 뒤 구원받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춤추며 찬양했다. 여러 가지 악기 연주와 함께 큰 소리로 찬양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북치고 춤추며 그를 찬미하며, 현금을 뜯고 피리를 불며 찬미하여라(시 150:3-4)”.

출애굽 당시의 찬양 춤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몸동작이었다.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기쁨에 충만하여 몸과 입술로 찬미를 올린 것이다.

신약성경은 악기 연주와 춤을 병행하는 찬양이나 예배의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 중세기 말 타볼파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견해를 가진 교회들은 춤은커녕 예배 중 악기를 사용하는 것도 금한다.

신약성경에 그러한 모범이 없으며, 그렇게 하라고 하는 적극적인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은 찬송을 지속적으로 하라고 가르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오늘날의 교회 안의 젊은이들은 음악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감동을 받은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음악은 영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수단인가? 악기 연주, 노래, 춤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감정을 고조시키고 기쁨이나 격앙된 감정에 도달하게 하려는 시도는 환영할 만하지 않다.

교회 음악에서조차 우리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가르침에 따름이 바람직하다.

4. <찬송가>, 회중 찬송 모음집

우리가 예배 때 사용하는 <찬송가>(Hymn Book)는 찬송, 찬송가, 복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세기 수도사 끌레르보의 베르나르(1091-1153)가 작곡한 ‘구주를 생각만 해도(85장)’ 등 3곡을 포함하여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 미국의 부흥운동, 오순절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래들을 수록하고 있다.

<찬송가>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올리는 한국교회의 회중 찬송 모음집이다. 개인의 삶이나 민중신학, 해방신학, 자유주의 신학 등을 선전하는 노래집이 아니다. 민중예찬 또는 인본주의 신념을 노래하거나 인간을 칭송하는 노래집이 아니다. 인간, 위인, 왕, 황제, 민중, 민족, 나라 따위를 찬양하는 노래 책이 아니다.

구약성경은 ‘찬송’을 151회, 신약성경은 48회 언급한다.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찬송의 대상으로 삼는다. 어거스틴은 시편 148편을 주석하면서 찬송을 정의하기를 “찬송이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만일 하나님이 없이 다른 무엇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찬송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톨레도 공의회(633)는 “찬송은 세 가지 요소 곧 노래, 높임,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다”고 정의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은 그 찬송을 기쁘게 받는다고 했다.

5. 우미유가바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일제 말기 한국교회들이 매 주일 예배 중에 불렀던 ‘우미유가바(うみゆかば)’를 떠올리게 한다. 1937년 작곡된 일제의 국민계몽용 ‘애국송’이라는 일본 가곡이다. ‘천황’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겠다는 노래이다.

“바다에 나간다면 나의 시체는 바다에 띄우고, 산에 나간다면 초원에 버린다. 아무튼 천황 가까이에서 죽는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
海行かば水み漬づく屍かばね山行かば草むす屍大君の辺へにこそ死なめ顧みはせじ.

장공 김재준
▲장공 김재준 목사의 영정. ⓒ크투 DB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 여러 해 동안 나라의 임금, 곧 일왕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겠다고 ‘찬송’했다. 교회가 주일 예배 중에 ‘우미유가바’라는 이름의 ‘애국송’을 합창했다.

한국교회 예배당에서 우미유가바가 합창되는 동안, 조선의 젊은이들은 악랄한 일제의 ‘대동아 전선’으로 끌려갔다. 날아오는 총알의 방탄막이가 되었다.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원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몰고 진주만을 공격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와 ‘우미유가바’는 모두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이 아니라, 국민계몽용 애국송이다.

<찬송가>에 수록되는 찬송, 찬송가, 복음송은 신학적 검증을 거친 것들이다.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예장 합동 제73회 총회는 1988년 이 곡(통일찬송가 261)을 교단 산하 교회들이 부르지 않도록 했다.

2008년, <찬송가> 편집 위원회가 예장 합동과 예장 통합 인사들의 이의제기를 무시하고 이 곡을 또 다시 찬송가에 수록했다. 찬불가를 작곡한 나운영 장로의 곡은 삭제하고, 찬송 또는 찬송가의 조건을 전혀 갖추지 않은 김재준의 위 노래 글을 담아 발행했다. 진실성과 정직성에 반하는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6. 금주가

찬송가답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의 <찬송가> 편집에서 탈락된 곡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금주가(1917)’이다. 이것은 황국국민 계몽용 노래이며, 조선 젊은이 선도용 노래였다. 기독교 사회운동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이 노래의 작시-작곡자 임배세는 이화여자전문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감리교인이다. 이 노래는 1923년 청년찬송가, 1931년 신정찬송가, 그리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합동으로 만든 합동찬송가(1949)에 포함되었다가, 1963년에 출간된 개편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 사회의 뿌리 깊은 조상신 숭배, 악습, 허례허식, 축첩, 음주, 흡연 등의 폐해를 고치려고 청빈, 금연, 금주 등을 강조했다.

일제 치하 기독교 절제 운동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진 젊은이들이 자포자기하고 향락적인 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동기로 예배, 주일성수, 효도, 순결, 근면, 정직, 술-도박-아편 금지 등을 생활강령으로 제시했다.

국민계몽용으로 만들어진 금주가가 찬송가에 포함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마지막 절에는 ‘천부(heavenly father)’와 ‘국가’를 언급한다. 전자는 창조자 하나님이고 후자는 일제(日帝)를 지칭하는 듯 하다.

1절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 두렵다

2절
팽가망신 될 독주는 빛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3절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4절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태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한국교회 최초의 <찬양가>(1894) 제4장은 ‘하나님 찬미(讚美主帝)’이다. 이것의 노랫말은 당시 기독인들의 신앙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찬미가>(1905) 제14장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로 시작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애국가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능자의 보호를 소망하는 믿음을 담고 있다.

위 두 곡조차 찬송 또는 찬송가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에 발간된 찬송가에서 제외되었다.

리포르만다 로마가톨릭 종교개혁 학술회
▲최덕성 총장이 과거 19세기 오르간을 들어 보이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크투 DB

7. 맺으면서

김재준의 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은 민중예찬가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칭송한다. 하나님을 찬송하거나 이와 관련된 신앙고백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 찬송으로 합당하지 않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위 ‘찬송 시’가 함량미달이거나 수준이 낮다고 폄하하고 있지 않다. 찬송가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찬송가>에 수록함은 부당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예배 중에 회중이 이 민중예찬가를 합창함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며, 신성모독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지속적으로 개혁하며 더욱 순전한 신앙, 진실된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합당한 찬송, 찬송가를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부르기를 희망한다.

차제에 덧붙여 세 가지를 지적하련다. 첫째, 찬송 또는 찬송가의 불명확한 한국어 표현이다. 예컨대 ‘되다(become, be done)’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되다’는 이루어진다, 만들어지다, 어떤 상태에 이르다, 결과가 생기다, 하게 되다, 변하다, 성취되다, 구성되다, 무엇에 이르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왕 되신 주 다 찬양하여라(24)’,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31)’,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88)’,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173)’,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315)’, ‘십자가 군병 되어서 예수를 따를 때(353)’, ‘나의 생명되신 주(380)’,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508)’,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569)’, ‘진리와 생명 되신 주(630)’ 등이다.

아래처럼 고치면 명료한 신앙고백 찬송으로 바뀐다. ‘왕이신 주께 다 찬양하여라’, ‘찬양하라 복이신 구세주 예수’,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이신 주’, ‘신랑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내 주 예수 주님을 참 사랑하고’, ‘십자가 군병으로서 예수를 따를 때’, ‘나의 생명이신 주’,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이지만’, ‘선한 목자 예수 우리 주’, ‘진리와 생명이신 주’ 등이다.

둘째, 잘 불려지지 않는 찬송들은 조속히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두희 장로의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559장)’, 남궁억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580장)’ 등은 애송되고 있으나, 대부분의 한국인 작사 작곡 찬송들은 환영을 받지 못하는 듯 하다.

필자가 잘 아는 몇 분의 이름이 작사자로 올려져 있으나, 사실과 다른 듯하다. 그들은 문학적 소양이나 시감을 가진 분들이 아니다.

셋째, 저작권에 관한 의문이다. 찬송의 가사와 곡의 저작권은 법의 보호를 받는다. 우리는 교회가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송 시와 멜로디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적재산권은 대부분 찬송 가사와 곡을 담아 최초로 출판한 회사가 가지고 있다. 이 찬송들을 연주한 영상물을 유튜브에 게재하면 저작권 침해라는 통보가 온다. 사용료가 얼마인가 하는 것보다, 내가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한국교회가 애창하는 찬송들의 원 저작권과 저작권료에 대한 한국찬송가공회의 대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최덕성 박사 (브레드유니버시티 대표. 현 브니엘신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