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 예수의 생애
▲승천 ⓒ서울미술관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태복음 3:2)”.

세례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복음 사역으로 시작되는 ‘징검다리’와 같았습니다. 천국 선포와 회개를 촉구하며 물로 세례를 주는 등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과 함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는데 일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절대 신뢰하고 순종하는 ‘여호와의 종’이셨습니다. 마귀는 바로 이것을 뿌리째 흔들기 위해 예수님을 저 사나운 광야에서 시험을 단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절박한 욕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의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를, 세상 권력을 통한 ‘자기숭배’보다는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을 말씀을 통해 밝히심으로써, ‘여호와의 종’의 도를 무결하게 실천하셨습니다.

니느웨에 있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라고 명령받은 요나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외면한 채,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함으로써 불순종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이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깊이 회개하고, 니느웨성으로 발길을 옮겨 그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랬을 때 니느웨 모든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섰고, 죄로 말미암아 눈멀었던 성은 회개를 통해 무너지지 않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에, 세상 일에 매여 살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최적화된 삶의 방식으로 바꾸라고 외칩니다. 마지막 날인 듯 오늘을 살고, 영원한 삶을 위하여 매 순간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속히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이 말씀은 오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핵심이며 증거요 이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일러 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율법학자들의 나라는 가상현실에 불과했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실재였습니다. 그 분은 당신 안에 이미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는 한 인격 안에 온전히 임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내적 고백이며 사회적 선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인격의 사회적 표현이고 회개는 사회적 쇄신인 인격적 표현인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개인적 회개와 사회적 쇄신이라는 두 차원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오늘도 모든 인류의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빛나기를 소망하시며, 서로 위하는 마음이 시냇물처럼 흐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좋은 예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롯이 주님만을 따랐습니다. 실로 엄청난 놀라운 사실입니다.

복음은 대체로 삶을 압축해서 전하고 있기에 그 과정은 서서히 이루어졌고,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예수님과 함께할 때 늘 행복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그 분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듣노라면 어쩐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거룩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울컥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그들 내면에 잠들어 있던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일깨워 주었고, 그들은 그 분과 함께 있을 때는 늘 기뻤으며, 자신을 넘어서는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존재의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오롯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고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들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시선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알지 못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 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태복음 20:20-22)”.

장차 닥쳐올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고 그 성취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주의 나라 곧 메시아 왕국에 대해 오해하며, 서로 높은 자리다툼으로 얼룩진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주의 나라의 특징은 섬김과 겸손에 있으며 스스로 죄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섬김의 모범을 보일 것을 말씀하시며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도 오롯이 자신들의 명예와 부, 그리고 권력을 갖고 통치하려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우리가 흔히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 중 한 부자와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 아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생전에 한 부자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호화롭게 살았고, 거지는 참혹할 정도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부자와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뜨거움의 고통 가운데서, 나사로를 보내 자신의 혀끝을 서늘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동시에 나사로를 자신의 가족인 형제 다섯에게로 보내 복음을 전함으로써, 영원히 고통 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누가복음 16:29)”. 그래도 부자가 가족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하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에서는,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세와 선지자의 복음을 듣지 않았고,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에 대한 복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궁핍한 자를 도우며, 고아와 과부, 삶에 찌들고 문 들어진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시며, 세상에서 복음 전하는 자들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돌아올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멸망 직전의 참람한 현실이 지금 이곳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신앙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희락에 심취해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음식, 그리고 세상 욕심과 권력을 추구하고, 몸에 좋다는 갖은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환경 파괴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간절히 요구되는 시대이지만, 지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물 건너간 듯 생각되나 봅니다.

회개하라는 복음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더디 오신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위해서는 많은 투자를 하지만, 정작 복음을 위해서는 냉랭합니다. 이웃이 고통을 겪고 있어도 모른 채 합니다.

또 다시 노아 시대의 대홍수 참사와 소돔과 고모라의 뼈아픈 멸망을 되풀이할 것인가요? 오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처럼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갈 것인가요?

하루 속히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그 방향 전환은 오로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가슴 깊이 품고 이웃을 향한 나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잠시잠깐의 쾌락을 멀리 하고, 곧 이사할 천국의 집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지금 이 땅에서의 괴로움은 천국으로 이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공정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천국 열쇠를 가슴 깊이 꽂으며 기쁨으로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선한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