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과 ‘자신’을 믿을 것을 요구하셨다(요 14:1; 17:3). 유대교, 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신앙에선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소위, ‘삼위일체 신앙관’이다.

이 믿음을 통해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三位)가 일체(一體)로 현현(顯現)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선 ‘삼위일체 하나님신앙’이 구현된다.

삼위 중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피조물)’ 관계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한다. 특별히 ‘창조’와 ‘구속’에 있어 그러하다. 그는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시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창조주 그리스도

단일신론자(monarchian) 유대교도들이 가진 ‘창조신앙’은 그리스도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창조는 삼위일체적(trinitic)이 아니다. 창조의 시종(始終) ‘야훼(yahweh, 삼위일체(Yahweh)와는 구분)’라는 이름의 단일신(單一神)이 일관한다.

이는 단지 ‘창조에서 성자 성령이 배제됐다’는 뜻이 아니다. 근본 그들의 창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神)의 창조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삼위일체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창조’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그는 ‘성자로 말미암아(요 1:3, 고전 8:6, 골 1:16)’, ‘성령의 능력으로(창 1:2, 시 104:30)’ 만물을 창조하셨다.

타락 후 ‘인간과 만물의 회복’에 있어서도 유대교도들은 할 말이 없다. 그들에게는 아예 성경이 말하는 ‘만물의 회복(행 3:21)’ 개념이 없다. 유사 개념인 정치적(political)이고 세속적인(worldly) ‘지상 천국(heaven on earth)’ 개념(행 1:6)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재창조(거듭남, 벧전 1:3, 23, 갈 6:15, 엡 4:24)’나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는(롬 8:20-21)’ 만물의 회복(골 1:20) 개념 같은 것이 없다.

‘태초의 창조’에 ‘성자, 성령’의 개입이 그들에게 불필요했듯, 그들의 재창조(?)인 ‘지상천국’을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속’ 같은 것은 불필요했다.

반면 삼위일체론자들에게는 ‘창조’에서와 같이, ‘재창조(만물의 회복)’에서도 반드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것은 창세(創世) 때의 ‘창조 완성(창 2:1)의 선포’를 재현한, 곧 ‘회복의 완성을 선포’한 것이었다.

또한 삼위일체론자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자연만물’의 중요 기능인 ‘하나님과 그의 영광의 계시(시 19:1)’가 손상된 후 ‘그리스도’가 그 역할을 꿰찼다고 보지만, 그리스도가 없는 단일신론자들에게는 ‘계시의 대안’이 없다.

그들은 기껏 자연으로부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하지 못할(롬 1:20)’정도의 ‘희미하고 추상적인 하나님 계시’만 취할 뿐, 제대로 된 하나님의 계시인 ‘삼위일체 계시’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구속주’을 믿는 정통 기독교 내에선, 둘의 관계 설정’에 있어 큰 틀에선 일치한다. ‘창조’와 ‘구속’에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창조 안에서 구속’을, ‘구속 안에서 창조’를 조망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견해차가 존재한다. ‘구속’을 비롯해 모든 신학의 기반을 ‘창조’라는 대전제에 두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같은 신학자가 있는 반면, ‘창조’를 ‘구속’에 종속시키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같은 신학자도 있다.

전자는 타락 전의 ‘완전한 창조세계’에 주목한 결과라면, 후자는 타락 후의 ‘무능한 창조세계’를 주목한 결과이다. 곧 ‘타락한 창조세계에서 어떤 계시나 교훈을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구속주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시면서 ‘구속주’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만물이 타락하므로 그것들을 ‘구속’할 필요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유대교 단일신론자들은 다르다. 이미 언급했듯, 그들의 하나님은 ‘창조주’도 못될 뿐더러 ‘구속주’도 아니다. 물론 그들도 ‘죄의 구속’을 입에 올리나 그것은 단지 ‘짐승피의 구속’일 뿐이다.

하나님께 ‘짐승의 피’를 드리는 것으로는 ‘죄의 구속’을 받을 수 없다(히 10:1-5).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고 하신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신앙’없이 다만 짐승의 피에 그들의 구속을 의존시킨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자는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믿는다. 그들에게 피의 실체는 ‘짐승’이 아닌 ‘그리스도’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행 5:42; 18:28)’는 말은 ‘예수를 구속주로 믿는다’ 혹은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풀어서 말하면 ‘예수를 사람 되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구태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안 해도 그 고백 속엔 ‘삼위일체 신관’이 함의돼 있다.

‘재창조(갈 6:15)’인 ‘중생’ 역시 그리스도의 구속이 결정적이다. 우리가 ‘창조’와 ‘구속’을 연결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없인 재창조인 ‘중생’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중생에 있어 ‘그리스도의 구속’은 어머니의 모태와 같다. ‘나의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다’고 노래한 ‘You are my son’이라는 가스펠(gospel song) 가사처럼, 십자가 복음은 성도의 거듭남의 모태(母胎)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요 3:3, 5)’, ‘복음으로 거듭났다(벧전 1:23)’, ‘말씀으로 낳았다(약 1:1)’.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거듭났다(벧전 1:3)’는 성경 말씀은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듭남의 모태(母胎)’ 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인 ‘중생’ 개념과는 달리 그것의 의미가 자주 왜곡돼 왔다. 계몽주의자들에겐 그것이 ‘행동과 삶의 변화’로, 칭의유보자들에겐 ‘의의 지속성(the sustainability of righteousness)’으로, 신비주의자들에겐 ‘신의 성품을 가지는 것(벧후 1:4의 왜곡)’으로 변질됐다.

유대교도들에게는 신약의 ‘중생(αλιγγενεσία)’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없다.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 온 유대교 랍비(rabbi)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말한 ‘중생’을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나는 것(요 3:4)’으로 오해한 것도 납득이 된다.

‘중생의 모태’인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는 이들에게 이런 ‘왜곡과 무지’는 당연한 귀결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