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무치, 몰염치, 철면피, 방약무인, 표리부동…
거짓말장이가 국가 지도자 되는 것, 가장 끔찍해
교회 안에도 이런 비겁한 자들 감싸는 무리 있어
정상인에 의한 정의롭고 따뜻한 세상 기도할 뿐

고양이 부끄러움 수줍음 자세 수치 shame
▲고양이가 부끄러워하는 듯한 모습. ⓒ픽사베이

‘다친 이(The Wound)’라는 필명의 그리스도인이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코너로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칼럼입니다.

주택 정책을 풍자한 청와대 국민청원 ‘시무 7조’로 큰 화제를 모은 ‘진인 조은산’의 ‘기독교 버전’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필명 ‘다친 이’ 님은 범상치 않은 글솜씨로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주요 이슈들을 쓴소리와 함께 성경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대안을 모색해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보통 사람으로서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한 마디 지껄여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시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양심에 어긋나거나 양심을 배반하는 일을 맞닥뜨리면 먼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한자로 부끄럽다는 뜻의 단어는 恥(치)입니다. 이 말을 찬찬히 보면 귀(耳)에 마음(心)이 조합되었으니, 즉 양심에 거리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한편으로 이 치(恥)는 얼굴과 관련이 많습니다. 먼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廉恥(염치)가 되고, 이 염치가 없는 사람을 破廉恥(파렴치)하다고 비난합니다.

무릇 염치가 있으려면, 얼굴로 제 품격을 지켜야 체면이 서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것마저 무시하거나 양심을 잃어버렸거나 마비된 사람의 얼굴은 ‘두껍다’고 표현하고, 이 두꺼운 얼굴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으로 厚顔無恥(후안무치)라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낮에 난 도깨비’란 말은 밤에 다녀야 제격인 도깨비가 제 분수를 잊고 낮에도 설치고 다닌다는 뜻으로, 염치가 없는 자를 빗댄 말입니다. 염치가 아예 없는 사람은 沒廉恥(몰염치)하다 하고, 가장 얼굴이 두꺼운 자는 鐵面皮(철면피)라 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의 행동을 표현한 말도 여럿입니다. 傍若無人(방약무인)은 ‘눈 아래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 ‘고삐 풀린 망아지’란 표현이 있는데, 무례하고 버릇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그런 자는 멸망한다고 경고합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16:5)”,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무엇보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表裏不同(표리부동)과 거짓말일 것입니다. 먼저 表裏不同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뜻합니다.

이런 자는 아예 양심이 퇴화되어 자신의 언행이 앞뒤가 맞지 않아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두꺼운 얼굴을 도깨비처럼 대낮에 치켜들고 다니면서 온갖 패악질을 감행합니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자는 거짓말을 태연하게 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니 朝變夕改(조변석개)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일단 남을 속이기 위함입니다. 남을 속여야 이득을 얻는다고 세뇌되었기에,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뱉어냅니다.

가장 끔찍한 사태는 거짓말하는 자가 한 국가나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우리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엄정하고 공평무사하며 정의로우며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대법원장의 입에서 버젓이, 그것도 대낮에, 온 국민이 쳐다보는 가운데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 정권 치하에서 개혁이랍시고 치달았을 때, 어느 정도 공정과 정의의 아픈 살이 도려져 나간다 해도 감내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어찌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프지만,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목격하고서도 속만 끓일 뿐 이렇다 할 대꾸나 반항도 못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눈 뜨고 당해야 하다니 가슴이 찢어집니다.

대법원은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려서는 안 될 국가의 수호자입니다. 이곳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의 정신과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무엇보다 대법원장의 정치적 중립은 사법부를 독립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핵심적 가치이자 모든 법관의 기본권을 지키는 반석입니다. 그러므로 대법원장의 책무가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가 알고 보니 ‘낮에 난 도깨비’였던 겁니다. 더 비겁한 것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니 며칠째 입을 다물고 있는 것입니다. 물러나라 하니 ‘물러나지 않는다’고 되레 호통합니다. 아마 그 자리를 지켜야 할 무슨 비밀의 약속이나 이유가 있나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같은 민초들을 진짜 화나게 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이들은 한때 정의의 사도들처럼 행세하였습니다. 한때 이들은 사법부를 개혁한답시고 모질게 전직 수장과 핵심 요원들을 처단하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런 집단적 요구에 의해 무려 100여 명에 달하는 법관들이 현 정권에 반대하거나 걸림돌이 된다고 하여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거나 재판석에 서는 등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소위 진보주의자라 자처하는 ‘전국법관회의’입니다.

그렇게 목소리 좋던 이들이 어째서 지금은 다들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법원장이 자기편 출신이고 자기편에 서 있다고 하여(?), 침묵하는 것입니까?

지난 보수 정권을 향해선 그렇게 독한 소리도 마다하지 않던 이들의 침묵이야말로 지금 정권과 附和雷同(부화뇌동)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세상이 변하니 이런 자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행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욱 아연실색케 하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비겁한 자들을 감싸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보다 정치적 이념을 더 앞세우는 듯 보입니다. 대체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면서, 왜 교회 안에 들어와 목사의 옷을 입고, 장로의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겁니까? 왜 거짓말하는 자와 그를 옹호하는 무리를 잘못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까?

마음 같아선 한시도 꼴보기가 싫습니다. 이런 자들이 터트리는 소음들로 인해 머리가 아픕니다. 주님, 부끄러움을 모르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으면서, 오직 자기 편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 작자들을 어찌 하오리까?

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꾹 참고, 오늘도 주님께 기도합니다. 제발 정상적인 사람들에 의한 정의롭고 따뜻하고 서로를 보듬고 존중하며 공정한 세상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아멘.

다친 이(The Wou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