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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열왕기상 16장 8-20절


나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은 다 망해도 나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박판에서 다른 사람은 다 돈을 잃어도 나는 돈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은 안 되도 나는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다른 노력을 하면서 창의성을 가지고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남들처럼 똑같이 하면서 나는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입니다. 다른 사람은 마스크 안 쓰면 코로나 걸릴지 모르지만 나는 마스크 안 써도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인생은 부메랑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법칙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법칙은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법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나에게는 예외 일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남들은 악을 행하고 나쁜 열매를 맺지만 자신은 남에게 악을 행하면서 좋은 열매가 맺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인간이 가지는 착각입니다.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하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 나옵니다.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 전투에서 추나라 관리가 서른세 명이나 죽었습니다. 문제는 추(鄒)나라 백성들이 관리들이 죽어 가는데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추(鄒)나라 왕인 목공(穆公)이 화가 나서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상관이 죽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던 그들을 모두 처벌하자니 수가 너무 많고, 그냥 두자니 윗사람 죽는 것을 미운 놈 바라보듯 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자 맹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흉년이 들었을 때 늙은이와 어린이는 굶어 죽고 젊은 장정들은 사방으로 살길을 찾아 떠난 수가 몇 천명이였습니다. 그때 임금의 창고에는 곡식과 재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을 구제할 대책을 세우지 않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증자(曾子)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戒之戒之 出乎爾者 反乎爾者也(계지계지 출호이자 반호이자야)”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네게서 나간 것은 네게로 돌아오는 것이니라.”

맹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백성들은 이제야 자기들이 당했던 것을 되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그들을 허물치 마십시오. 임금께서 어진 정치를 베푸신다면 백성들은 윗사람에게 친하게 대할 것이고 윗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네게로 나간 것이 네게로 돌아오는 것이니라”는 말은 곧 인생은 부메랑이라는 것입니다. 부메랑을 던지면 회전을 하면서 앞으로 날아갑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날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시점에 가면 다시 방향을 틀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곧 우리 인생도 내가 상대방에게 한 그대로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너는 또 다른 나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는 또 다른 나’라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너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왕대접을 받고 싶으면 남을 왕처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거지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남을 거지처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곧 다른 사람이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몰락=바아사의 몰락=시므리의 몰락

유다 아사왕 제26년에 엘라는 아버지 바아사를 이어 북이스라엘 왕에 오르게 됩니다. 엘라는 주력부대를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깁브돈에 출격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궁의 일을 맡아보던 아르사의 집에 가서 연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지금 군대는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전쟁터로 보내놓고선 왕이 향응을 즐긴다는 것은 엘라라는 왕이 어떤 왕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라왕의 신복인 시므리는 엘라가 술에 취해 정신이 없을 때 그를 죽여 버립니다.

시므리가 병거 절반을 통솔한 지휘관으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므리는 왕궁수비를 맡고 있던 군대장관이라고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시므리는 엘라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한지 2년 만에 그를 살해하고 바아사의 온 집안사람들을 다 죽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아사 집안의 친족들과 친구들 가운데 남자는 다 죽여버립니다. 바아사의 집안의 몰락은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여로보암집안의 몰락과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아사는 여로보암이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된지 2년째 되는 해에 반기를 들고 여로보암의 가문을 다 몰락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시므리는 바아사가 24년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된지 2년째 되는 해에 반기를 들어 바아사의 가문을 다 몰락시켜 버립니다.

바아사가 여로보암 가문에게 행한 모든 것을 시므리에게 고스란히 당하고 있습니다. 바아사 가문뿐 아니라 시므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므리는 엘라왕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7일 만에 죽음 맞이합니다.

오므리가 이끄는 북이스라엘의 주력 부대는 시므리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지휘관인 오므리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깁브돈에서부터 회군하여 시므리가 있는 디르사를 에워쌉니다. 시므리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합니다.

물론 여로보암의 가문이나 바아사의 가문이나 시므리는 하나님앞에 범죄하였기에 그 대가로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행한 그대로를 갚아주시면서 그것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메아리다

미국에 경제공황이 왔을 때 많은 사람이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취업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헤맸지만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었고 가난과 궁핍을 벗어나기도 힘들었습니다.

한 청년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주머니에는 1달러짜리 지폐 한 장만 달랑 남아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빵 한 덩어리를 샀지만, 이걸 먹고 나면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청년은 구걸하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든 청년은 자신이 가진 전부라 할 수 있는 빵을 반이나 잘라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청년은 노인이 빵을 허겁지겁 먹을 줄 알았는데, 노인은 지나가던 구두닦이 소년에게 받은 빵의 반을 주었습니다. 몇일 동안 굶은 듯 마른 구두닦이 소년은 노인과 청년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빵 냄새를 어디서 맡았는지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와 뛰어가던 소년의 다리에 매달려 낑낑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자신이 받은 빵의 반을 잘라 강아지에게 주었습니다.

한 번 빵의 맛을 본 강아지는 이제 가장 큰 빵을 들고 있는 청년에게 달려와 다시 낑낑거렸습니다. 청년은 강아지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마음이 들어 남은 빵을 조금 떼어 강아지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개목걸이에서 강아지 주인의 주소를 확인했습니다. 청년은 강아지를 안고 주인을 만나러 찾아갔습니다. 그는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아 기뻐하던 주인은 청년에게 사례금을 주고 이렇게 심성이 좋은 사람이라면 함께 일하고 싶다며 일자리까지 주었습니다. 청년의 나눔은 그대로 청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등산해서 산꼭대기 올라가면 꼭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호’입니다. 야호 하고 외치면 저쪽에서 다시 야호 하고 메아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옛날 우리 동요 중에서도 ‘메아리’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그런데 어떤 소리를 외쳐도 메아리는 반가이 대답을 해 줄까요? 산꼭대기 가서 큰 소리로 욕을 해도 메아리는 반가이 대답을 해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메아리는 반가운 소리를 해야만 반가이 대답을 해줍니다. 반가운 소리를 안 하고 욕을 하면 메아리는 욕으로 대답을 합니다.

대접하는 대로 상 받는다

마태복음 10장 41-42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비록 선지자가 아니지만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잘 대접하면 선지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의인이 아니지만,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대접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거울 속에 있는 나다

다른 사람은 거울과 같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세수를 하시면서 또는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서 거울을 보시지요. 입은 옷이 잘 어울리는 가를 보기 위해 거울을 보기도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은 거울 보고 춤을 연습합니다.

거울은 어떻습니까?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거울 속에는 또 다른 내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런데, 거울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는 너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곧 내가 하는 그대로 다른 사람도 나에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대접을 받든 그 대접을 받는 것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한 그대로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는 예외일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외 없이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말이 바뀐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까요? 첫째, 말이 바뀌게 됩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받기 싫거든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나도 똑같이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나에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겠습니까?

김범준 씨가 쓴 <모든 관계는 말투에서 시작된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화란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생각에서부터 대화의 실마리는 풀리기 시작한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얻는 성공적인 대화를 끌어갈 수 있다.”

김범준 씨는 상대와 대화할 때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라고 하면서 대화할 때 두 가지만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첫째, 내가 좋아하는 말투를 상대방에게 하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말투가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곧 내가 좋아하는 말투로 상대에게 말하면 상대도 좋아하게 됩니다.

둘째, 내가 싫어하는 말투는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가 내가 싫어하는 말투를 사용하면 어떻습니까? 별로 대화를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싫어하는 말투로 상대에게 말하면 상대방도 그것을 싫어합니다. 결국 상대가 나라는 생각으로 대화를 하면 내가 좋아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게 됩니다.

말한대로 된다

말은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망의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말을 듣고 삶을 두고 맹세까지 하시면서 그 말 그대로 해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말,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 말을 사람도 듣지만 하나님도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듣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한 대로 그대로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게 된다

둘째,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이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때로 제 자신이 싫고 미울 때가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주의 종으로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제 자신이 싫고 밉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어김없이 밥을 먹습니다. 몸이 아프면 쉬든지 약을 먹든지 병원에 갑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양치질 합니다. 여자 분들은 화장도 예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 나라고 생각하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정말 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를 해롭게 하고 그 사람만 생각하면 화가 나고 원수처럼 여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언 25장 21절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예수님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그 원수가 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라고 생각하면 사랑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하듯 하라

사도 바울은 이 차원을 뛰어넘는 말씀을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 말씀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바울은 일을 할 때도 사람을 대할 때도 주님을 대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은 또 다른 나입니다. 거울속의 나입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습니다. 곧 너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말부터 바뀌게 됩니다.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는 “설교를 만들어내기 힘들어 자괴감도 들고 목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김도인 목사를 대신해 목회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감사인생(공저)’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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