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교회 실종교인 결의
▲부산 한 교회 게시판에 일방적으로 붙인 소위 ‘실종교인’ 명단. 최근 400-500명이 교회를 떠났지만, 쇠사슬로 출입을 막은 이들 55인의 이름만 적어놓았다. ⓒ크투 DB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이사야 29:13)”.

이사야 29장의 주 내용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게 된 원인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영적 방탕과 무지, 둘째는 그들의 위선적이고 형식주의적 신앙, 셋째는 하나님을 속이고 배신한 것입니다.

이에 유다는 열방의 침략을 당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들을 돌이키실 때 이전과 같은 영광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16-20)”.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막 1:21-26)”.

오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고,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적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자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저이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다니, 귀신들에게 명령했는데 귀신들이 순종하다니!” 그 회당 안에 있던 모인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것은, 지금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새로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되돌리며 창조물을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고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차근차근 배우며, 나누고 베푸는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재능이 없어서, 가진 게 없어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너무 겸손해지는 삶보다, 적극적인 동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복음의 열정이 하나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시적인 입술과 과장된 포장으로 마음을 훔치려는 사고방식을 멀리하고, 어린아이처럼 조잘대며 어린 양들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순수하고 귀여운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신앙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케 하며, 하나님의 근심을 덜어드리는 천국의 아름다운 찬양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순수한 아이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 법이 필요치 않은 순수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법을 교묘히 이용해 세상 권력으로 숨 가쁘게 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법이란 힘없고 연약하며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입술로는 외치고 있지만, 실상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교묘히 빠져나가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일쑤입니다. 차라리 법이 없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세상과 교회가 구분되지 않는 시대에 이르러, 행함은 온데간데없고 오롯이 자신의 영욕만을 위해 입술로 외치면서 교회 정치를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언제까지나 그저 방관만 하고 계실까요?

심지어 예장 통합 소속 부산 북구 덕천동 어떤 교회 당회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덮기 위해, 비싼 변호사비를 들여가며 세상 법정에 고소고발을 남발합니다. 결국 보다 못해 상대 진영에서 목사를 고발했던 사건이 대법원 판결까지 유죄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향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바른 소리를 내다 쫓겨난 성도 55명을 ‘헌법 정치 제3장 19조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은 실종교인을 결의하다(2020년 8월30일 당회 결의사항)’고 일방적으로 공고했습니다.

쫓겨난 성도들이 보지도 못하는 게시판에 일방적으로 명단을 적어 붙여 놓으면, 그 사람들의 명예는 어찌 되는 것인가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사항은 아닐까요?

신문에 공고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끼리 보는 교회 내부 게시판에 이름을 붙여 놓으면, 교회 바깥으로 쫓겨난 성도들이 볼 수나 있을까요?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입니다. 자신들 눈엣가시인 성도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내려는 악의적인 꼼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를 떠난지 10년이 넘은 사람들도 그대로 성도 명단에 넣어놓고 방치하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함께해온 성도들을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쫓아내려는 그들은, 진정 크리스천들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떠오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태복음 18:6-7)”.

요즘처럼 통신망이 잘 되어 있는 시대에 전화 한 통 없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기일을 정하여 공고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처사입니다. 그동안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약 400-500명으로 추산되는데, 오로지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여긴 55명만 ‘실종교인’으로 공고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떠난 성도들 모두에게 했더라면 어떻게 이해해 볼텐데, 창립 이래 50여년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계속 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믿음대로 살지 않고 오롯이 입술과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당회는 오롯이 주님을 위해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욕심과 명예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 분규는 오롯이 목사와 장로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하고 행함의 사도들이 되어야 할 그들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세상법과 교회법은 오롯이 국민들과 성도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권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정한 대로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 권력은 물론 목사 장로들의 힘에 짓눌리는 사람 없이, 서로 소통 속에 사랑으로 아우르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도들일 것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법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법입니다. 혹 예상치 못한 죄를 지었을 경우,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면 품어주는 포용력으로 서로 용서하며, 보듬어야 할 것입니다.

입술로 주님을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며, 오롯이 이웃을 향한 따뜻한 배려와 품을 수 있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장 통합 부산남노회와 총회는 법을 악용한 이러한 처사로 인해 성도들을 추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법이 잘못됐다면 수정해야 합니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한 진상조사를 펼쳐야 합니다. 이를 통해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정치하는 목사나 장로들에게 일침을 놓고, 두 번 다시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회와 총회가 앞장서서 해결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