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님이 하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는 말씀은 오기(吳起, B.C. –381, 전국 시대 위나라 명장)의 ‘오자병법(吳子兵法)’에 나오는 ‘必死卽生 幸生卽死(죽고자 하면 살고 요행을 바라면 죽는다)’처럼 ‘자기보신적(自己保身的)인 신앙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혹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살면 영적인 생명을 잃고, 육신의 생명을 버리면 영적인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는 ‘육신의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구분짓는 영지주의적 이분법으로 옳지 않다. 어떤 생명이든 그것의 생명보존 욕구는 비난받을 수 없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순교를 해야 구원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은혜가 아닌 자기 공로가 되며, 아마 구원 얻을 자도 희귀할 것이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순교를 요구하시면 기꺼이 거기에 응답하려고 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한 자가 구원을 얻는다’, 곧 ‘구원이 옛사람의 죽음에서 출발한다’는 뜻이며, 그의 ‘생명의 속성’이 ‘구속적 생명(redemptional life)’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자신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시키지 않고 아담의 옛사람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은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닌 ‘죽음을 사는 것’이다.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롬 6:6)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

그가 자각하든 못하든, 인정하든 안 하든,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자’는 그때부터 자신은 죽은 것이 되고 그리스도가 그에게서 산다. 소위 ‘구속론적인 사생(死生)의 원리’가 작동되기 시작한다. 다음의 사도 바울의 말은 이에 대한 진술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누가 일생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았다면 이는 그 자신의 힘으로서가 아닌, 그에게서 사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그를 그렇게 이끈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고(마 16:26),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소유(요 6:47)’한 것도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한 후,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의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잃음

‘목숨을 잃음’을 꼭 여자적으로(literally) 받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잃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공로주의(meritocracy)가 되어 교리상 문제가 생긴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그리하여 ‘자기 죽음’을 구현하는) ‘구속적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어 보인다.

우리의 생명이 ‘구속적인 생명(the redemptional life)’이듯, 우리의 죽음 역시 ‘구속적인 죽음(the redemptional death)’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잃음’도 같은 맥락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시켜 전적 무능한 ‘죽음의 상태’로 만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 역시 우리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이 영광을 독점하려고 ‘인간의 행위와 자랑거리가’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엡 2:9), 오직 ‘그의 은혜’에 의존시켰다고 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구원에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 ‘인간의 행위’를 첨가시키는 것은 그의 ‘구속의 영광’을 욕되게 할 뿐더러, 그의 ‘영광을 침탈’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영광을 누구에게 양보하거나 공유하지 않으신다(사 42:8).

하나님의 영광을 침탈한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병이 들어 ‘광야의 독수리’같이 되고(단 4:32-33), ‘헤롯 왕’이 충에 먹혀 죽은 사건은(행 12:23) 하나님의 ‘자기 영광에 대한 독점욕’이 얼마나 크신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 어느 누구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고, 시종(始終) 당신 홀로 주관하시는 것도 영광을 독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

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지 않아 자기를 사망에 넘기지 않은 자는 자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리스도를 유일 구주로 높이지 않는다. 이런 자들에게서 하나님은 취할 영광이 없다.

◈목숨을 잃어 목숨을 찾음

‘죽음으로 목숨을 찾음’은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 그가 내 ‘생명의 주’와 내‘실체’가 됨’을 뜻한다(갈 2:20). 누구든 옛사람 ‘아담의 생명’ 그대로 존속하는 것은 ‘죽음의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그가 내 생명의 주와 실체가 될 때 비로소 ‘산 것(alive)’이다. ‘값으로 사신바 됐다’는 ‘구속(고전 7:23, 행 20:28)’이 의미하는바 그대로다.

따라서 ‘목숨을 잃은 적이 없는 자’,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지 못한 자’는 그에게서 ‘자기 죽음’이 실현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의 주(主)’도 ‘생명의 실체’도 되지 못한다. 그는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닌 ‘죽음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그리스도가 내게서 사는 것(빌 1:20, 21)’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은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죽으신 두 가지 목적, ‘대속’과 ‘그의 주인 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믿음’을 높이고(요 11:40, 롬 4:19-20, 히 11:6),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부르짖었던 이유도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시켜 우리에게서 이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신득구(salvation by faith, 以信得救)’를 외치는 이유도 그것이 손 안대고 코푸는 ‘쉬운 구원’이어서가 아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시켜 그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정확한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한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목숨을 잃어 목숨을 찾는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해 ‘자기 죽음’을 구현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런 ‘믿음’ 개념에는 ‘무신론적 종교 심리학자들’의 ‘인식론적 믿음’ 개념이나, ‘신념적 믿음’ 개념이 깃들 여지가 없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