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 채플 의자 교회 자리 예배 목사 마이크 집회
▲한 교회 예배당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어느 날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아주 간단합니다. 다비드와 관련 없는 것은 다 버렸습니다.” 이쯤 되려면 대단한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다비드 상을 만든다면, 십중팔구 다비드의 모습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장인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다비드 상 자체보다, 그것이 아닌 나머지 불필요한 부분에 집중한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다비드 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남겼다. “지혜로운 자의 목표는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피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을 얻으려면 미움을 피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평안을 원한다면 분쟁을 금하는 일에 몰두하면 된다. 탁월한 선택을 하는 노하우 역시 잘못된 선택을 피하는 것이다.

오늘 2시간 반 동안 줌(zoom)으로 설교학 강의를 했다. 강의 제목은 ‘강해 설교’였다. 강해설교의 정의부터 설명을 했다.
‘강해 설교(Expository Preaching)’란 가장 성경적인 설교를 말한다. 그런데 이 강해설교에 대한 오해들이 많다.

그렇다면 ‘강해 설교’는 어떤 것을 얘기하는 것일까? 강해 설교를 가장 쉽게 이해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있다. 뭘까? 강해 설교가 아닌 것, 강해 설교라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강해설교가 아닌 것에는 뭐가 있을까?

첫째 ‘주해(Exposition)’이고, 둘째 ‘주석’(Exegesis)’이고, 셋째 성경공부(Bible Study), 넷째 주해 설교(A Running Commentary)이다.

보수 교단 설교자들은 성경 본문에 충실한 특성이 있다. ‘본문! 본문! 본문!’ 그들은 본문에서 벗어나면 죽는 줄 안다. 그러다 보니 본문에 집중하면 그걸 강해 설교인 줄 착각한다.

위 소개한 강해설교가 아닌 것 네 가지를 보라. 이들은 강해 설교를 위한 준비 작업들이다. 본문을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강해 설교가 될 수 없다. 충실한 본문 해석에다 오늘 청중들의 삶에 적용이 첨가되어야 비로소 강해 설교이다.

그렇다. 강해 설교란 ‘본문 저자의 핵심 메시지(Main Message)’에다 ‘삶의 적용(Life Application)’까지 겸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켈란젤로가 훌륭한 다비드 상을 만들기 위해 다비드 상과 관련 없는 것들을 알아서 버려야 한다고 말했듯, 강해 설교를 쉽게 알기 위해선 강해 설교가 아닌 것을 잘 파악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수년 전 지방에서 담임으로 목회하는 제자 목사 교회의 한 장로님을 만나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다. 식사 중 그 장로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교수님, 우리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관해 성도들이 말이 많습니다. 사람은 참 좋은데 설교가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후배 장로들이 자꾸 쫓아내려고 해요.”

그래서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담임목사님 강해설교 좀 안 하게 해주세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 그 친구가 강해 설교를 못해서 그런 거예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장로님께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을 드렸다. 강해 설교는 따분하지도 지겹지도 않은 설교이다. 만일 효과적으로 잘 전달되지 않는 설교가 있다면, 그것은 강해 설교가 아니다.

본문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청중들의 삶에 잘 적용시킨다면, 그게 강해 설교이다. 강해 설교라 해서 본문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거나,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남발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강해설교가 아니다.

강해 설교는 짐승을 잡아서 영양만점의 살점 덩어리를 잘 발라내 그것을 청중들이 게걸스럽게 먹을 수 있게끔 맛있는 양념을 치고 맛깔스럽게 요리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양극단으로 나아감을 볼 수 있다. 본문에는 충실하나 청중에게 잘 적용해서 전달하지 못하는 설교자들, 적용과 전달은 탁월한데 본문에 충실하지 못한 설교자들로 양분된다.

둘 중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본문과 적용이 양자 겸비가 된다면 그게 강해 설교이다. 강해 설교를 싫어하는 설교자를 본 적이 없다. 모두가 강해 설교를 선호하고 스스로 강해 설교를 한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강해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성경적이고 효과적인 설교(Biblical & Effective Preaching)인 강해 설교가 한국 강단을 지배하는 날이 속히 오면 좋겠다.

신성욱
▲신성욱 교수.
신성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고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