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예수의 생애
▲영화 <예수의 생애> 한 장면 ⓒ모팩(MOPAC) 제공
<해피닝>의 저자이자 ‘고품격 유머’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이상준 작가의 칼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유머가 최고의 영성 또는 최고의 영적 리더십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유머와 영성의 정확한 의미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먼저 유머. 유머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머의 의미는 대개 왜곡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유머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왜곡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유머는 인격

가장 왜곡된 편견은 유머가 체통이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유머가 최고의 영성이기는커녕, 반대로 영성을 해치는 것이라는 편견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유머가 이런 편견을 가지게 된 원인은 유머와 개그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개그와 코미디를 포괄하는 보다 큰 개념이다. 즉 개그와 코미디는 유머의 부분집합이다(유머 ⊃​ 개그(코미디))다.

유머는 목적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웃음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둘째는 웃음 이외의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웃음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개그나 코미디다. 그래서 큰 웃음을 얻으려고 음담패설과 같은 무리수를 쓰기도 한다. 유머가 품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반면 웃음 외의 것을 얻기 위한 목적의 유머는 웃음에만 올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큰 웃음을 만들려고 무리수를 쓰지 않기 때문에, 품위를 떨어뜨릴 염려가 적다.

‘웃음 이외의 것’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것이 ‘인격 지키기’다. 가령 화나는 상황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인격을 지키기 위해 유머를 사용하는 것이다.

선거 유세 중이던 처칠에게 모르는 여인이 다가와 물었다. “처칠 씨.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이런 상황을 만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가 하루에도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닙니다. 일일이 다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하고 가볍게 타박을 줄 것이고 상대방은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하지만 처칠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 “부인. 내가 부인같은 미인을 머릿속에 넣어놨다간… 아무 일도 못했을 겁니다.” 인격이 돋보이는 유머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인격을 지키려고 유머를 했는데 그 유머가 저속하다면, 기껏 지키려던 인격에 흠집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인격을 지키려는 목적의 유머는 품위를 떨어뜨리지않도록 하게되는 것이다.

유머에 대한 또 다른 왜곡된 오해는 실없는 농담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누가 우스갯소리를 하면 ‘흰소리한다’는 식으로, 진지하지 못하고 가벼운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점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농담도 열심히 사는 사람이 의미 있게 한다면 ‘실없는 사람’으로 평가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과 백악관에서 회의를 했다. 회의가 끝나고 우연찮게 집무실에서 대통령과 단 둘이서만 말 없이 대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시간이 흐를 때 레이건이 다가오더니, 벽에 걸린 워싱턴 초상화를 가리켰다. 워싱턴이 한 손을 옷속에 집어넣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말이야,” 레이건이 말했다. “저 그림을 볼 때마다 저 분이… ‘내 지갑 잘 있나?’ 하고 있는 것 같아.” 같이 웃음을 터뜨렸고, 어색함이 사라졌다.

‘체통 떨어진다, 진지하지 못하다’ 등의 평가는 유머의 일부분일 뿐이다. 유머 전체를 싸잡아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마치 ‘모든 말(언어)은 다 나쁜 말이다. 모든 인간은 다 악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 중에는 험한 말도 있고 고운 말도 있듯, 사람 중에는 미숙한 인간도 있고 성숙한 인간도 있듯, 유머도 값싼 유머가 있고 고귀한 유머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나 진지함을 초월하는 높은 차원의 것이다. 유머의 이 고차원적이고 초월적인 특성이 다음에서 설명할 영성과 맥이 닿아있다.

영성은 인성

이제 영성 차례다. 영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영성과 인성은 어떻게 다르고 서로 어떤 관계일까?

어떤 분들은 인성은 비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일반인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고, 영성은 크리스천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영성과 인성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첫째 계명이 하나님 사랑, 둘째 계명이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이 영성이고, 이웃 사랑을 인성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으므로, 영성을 인성의 뿌리로 보기도 한다. 인성은 열매다.

문제는 영성은 훌륭한데 인성이 별로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영성을 신앙심으로 바꿔 말한다면, 신앙심은 뜨거운데 가정에나 사회에서 불성실한 사람들이 종종 있다. 뿌리(영성)만 튼튼하고 열매(인성)는 빈약한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데 열매가 빈약한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줄기나 가지가 부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발전소에서 아무리 풍성한 전기를 생산한다 해도, 전선이 끊어지거나 약하면 가정에서 불을 밝힐 수 없다.

그런데 반대는 성립한다. 열매가 풍성하다면 그 식물은 반드시 뿌리가 튼튼하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고서 열매가 풍성할 순 없는 법이다. 고급 저택의 샹델리에가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면, 반드시 풍부한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크리스천의 높은 영성이 반드시 높은 인성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높은 인성은 반드시 높은 영성을 전제로 한다. 높은 영성만 있고 인성이 좋지 않다면, 성숙한 크리스천이라 볼 수 없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영성과 인성이 동시에 좋은 크리스천이 균형 있게 완성된 크리스천인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협의의 영성으로 볼 수 있다. 이웃 사랑은 인성이다. 광의의 영성은 협의의 영성과 인성을 합친 것이며, 비로소 완전한 영성이 완성된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 즉 협의의 영성은 식물의 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웃 사랑 즉 인성은 열매처럼 눈에 보인다. 영성의 바로미터는 인성인 것이다.

어느 크리스천의 인성이 훌륭하다면 그는 좁은 의미의 영성인 신앙심도 훌륭한 것이며, 넓은 의미의 완전한 영성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로 든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일반적인 인성의 덕목들인 성실, 친절, 배려 등과 대체로 일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크리스천의 영성이 얼마나 높은가는 인성이 얼마나 좋은가를 보면 된다. 열매(인성)을 보면 그 나무의 뿌리(협의의 영성)도 알 수 있으며, 나무 전체(광의의 영성)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에선 성인(saint)을 ‘순교자나 거룩하게 살다 죽은 이 가운데 훌륭한 덕행과 모범이 인정된 사람’으로 정의한다. 덕행과 모범 즉 인성을 순교와 함께 영성의 가시적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인과 의인 중 죄 없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은 분은 단 한 분도 없다. 모든 성인들은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였다.

이제 유머와 영성의 정확한 의미를 알았으니 유머가 왜 최고의 영성, 최고의 인성인지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최고의 영성으로서의 유머는 대단히 다양한 측면에서 나타난다. 먼저 분노와 미움을 초월하는 측면이 있다.

1) 분노와 미움을 초월하는 최고의 영성: 유머

​한 학원 선생이 운전하다가 열이 받아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했다. 그런데 아뿔싸! 학원에서 가르치는 초등 저학년 남자아이가 눈을 뗑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그가 말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욕을 해야되는 상황이 있단다. 엄마한테 얘기할 거니?” 아이가 대답했다. “아뇨. 우리 엄마는 더한데요 뭐.”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비난하는 사람에게 제정신으로 침착하게 대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가 나를 공격하면 일단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응징에 나서게 된다.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성경에 있었나 싶은 것이 현실이다. 상대의 까칠함에 같은 까칠함으로 보복하는 것은 삼류다.

나를 화 나게 만든 상대방에게 화 내는 게 정상이지, 그게 왜 삼류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감정을 관장하는 야성의 뇌(wild brain)에서 분노가 만들어지는데 이성을 관장하는 지성의 뇌(wise brain)가 억제해서 참게 되는 것이다.

동물들은 화를 그대로 드러낸다. 지성의 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화날 때마다 그대로 드러낸다면 동물과 비슷해지며, 싸움닭처럼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연도의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손을 누군가가 갑자기 끌어당겼다. 넘어질 뻔한 교황이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며 얼굴이 굳어졌다. 이 모습을 두고 교황도 화를 내느냐며 일부에서 의문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화를 내야할 때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참을 줄 아는 사람이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 잘 참고 넘어가는 정도만 되어도 훌륭하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이류다. 그럼 일류는 뭘까? 웃음과 유머로 응수하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말년에 자신이 지원했던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분’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만 듣고 살아서 은근히 걱정이었습니다. 그런 비판을 한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류의 인품은 단순히 꾹 참고 그냥 넘어가는 수준을 초월한다. 키 작은 사람에게 키 작은 걸 은근히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삼류는 역정을 낼 것이다. 이류는 꾹 참고 “남의 아픈 곳 함부로 건드리는 거 아니요” 하고 굳은 얼굴로 말할 것이다. 일류는 이렇게 말한다. “나보다 큰 키는… 은혜입니다.”

요즘 악플이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예수님이시라면 악플에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크리스천이라면 꽤 궁금해할 부분이다.

요한복음에 그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가 있다. 요한복음 1장 44절부터의 내용을 현대 구어체로 옮겨보면 이렇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빌립이 흥분해서 친구 나다니엘에게 달려가 말했다. “이보게. 내가 드디어 메시야를 만났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야!”

그러자 나다니엘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 친구야. 도시도 아니고 나사렛같이 별 볼 일 없는 촌구석에서 뭐 신통한 것이 나오겠냐? 또 허풍꾼이겠지.”

대개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더 심하게 말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 정도 악플에도 욱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이윽고 빌립의 손에 이끌려 온 나다니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참다운 사람이로다. 그 속에 거짓이… 하나도 없다.” 자신에 대한 악플이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대댓글을 다신 셈이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의 여유와 넉살이다. 필자도 최근 악플에 이렇게 예수님처럼 유머로 대응한 적이 있다. <계속>

해피닝 이상준
▲이상준 작가는 “오늘날 성경은 예수님 말씀의 핵심을 잘 담고 있지만, 너무 딱딱하게 묘사하고 있다”며 “단언컨대 유머 화법의 최고 스승은 예수님이다. 그 분은 유머와 상극인 고난의 삶 속에서 유머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고 환한 빛을 발했다”고 말했다.
이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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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해피닝>, <이타적 자존감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