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리스도란 ‘하나님’이면서 ‘참 사람’이신 분이라는 뜻 외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다.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세운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2천 년 전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나사렛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마 16:16)’이다. 우리는 그를 믿어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다.

◈왕이며 제사장

그리스도의 3직 중 왕직(kinghood)은 우리에게 ‘죄 사함과 구원’을 주는 직(職)이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향해 ‘네 죄를 사했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왕직(the kinghood of christ)’을 행사한 것이고,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을 자증한 것이다. 이는 ‘죄 사함’은 오직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속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를 필두로 한 신칼빈주의자들(neo-calvinists)이 내건 ‘세상의 제(諸)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자’는 슬로건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하나님을 지나치게 교회 안에만 가두어 둔 것’에 대한 자성과 ‘기독교 세계관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지나치게 그것에 올인하므로,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왕권’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 자신의 말처럼 자신은 세상의 왕이기보다는(요 6:15) ‘야곱 집(the house of Jacob)’의 ‘죄사함을 주는 왕’이길 원하셨다.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눅 1:33, 77)”,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왕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그리고 이 죄 사함을 주는 ‘왕직(kinghood)’은 그의 ‘제사장직(priesthood, 속죄)’에 기반한다. 성경이 ‘왕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 벧전 2:9)’이라고 한 것은 단지 왕의 지위에 견줄 만한 ‘제사장의 존귀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직(kinghood)과 제사장직(priesthood)의 불가분리성’ 혹은 ‘둘의 상호교호성’을 말한 것이다. 곧 ‘제사장직에 기반한 죄 사함의 왕권’(혹은 죄 사함의 왕권을 행사하는 제사장직)을 말한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5)’, 간음 중 붙들린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요 8:11)’고 한 것은 자신의 ‘제사장직에 기반한 죄 사함의 왕권’(혹은, 죄 사함의 왕권을 행사한 제사장직)의 행사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마 21:5)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 ‘청결 작업’을 하신 것(마 21:12, 13)은 그가 ‘왕’인 동시에 ‘제사장’임을 천명한 상징적인 행위였다.

예수님이 ‘나귀를 탄 왕의 행차(마 21:5-9)’를 연출한 것 역시 뭔가를 희화화(戲畫化)해 보이려는 ‘해학적인 이벤트(humorous event)’가 아니었다. 그가 ‘대속물(제사장)’이 되어 ‘죄 사함’을 주는 ‘겸비한 왕’의 모습을 사실화(事實化) 한 것이다.

그것은 장차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릴 ‘비천한 왕’의 모습(마 27:28-37)을 표상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현군(賢君)의 면모를 과시하고 백성을 통합하기 위해 ‘사면권’을 행사한 전제군주(專制君主)의 정치행위와 그것은 전혀 다르다.

이러한 십자가에 달리신 ‘비천한 왕’은 당연히 세상의 지혜자, 능력자들에게는 백안시당했고, 약하고 비천한 죄인들에게만 환영을 받았다. 그리스도가 타신 ‘나귀’는 그가 ‘왕 노릇’할 세상의 ‘비천한 죄인들’이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1-53).”

◈선지자이며 제사장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장직)를 믿어야 죄 사함을 받는다(마 16:16, 19, 롬 10:9). 그러려면 죄인은 누가 ‘구속자’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오직 ‘선지자’ 그리스도의 계시로만 알려진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마 23:8)”,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 2:27)”.

이는 그리스도가 죄사함을 주는 ‘제사장(구속주)’인 동시에 ‘선지자’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속주 됨(제사장직)’을 죄인에게 계시하면(선지자직) 죄인이 그를 구속주로 믿어 구원받는다.

그가 자신의 ‘선지자직(prophethood)’을 수행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때론 직접 ‘내가 대속물이다’고 선언하므로 그의 그것을 수행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때론 대적자들의 말에 답변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눅 22:66, 70)’”.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눅 23:3)”,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3, 64)’”.

그리스도 승천 후, 그가 직접 자신의 ‘선지자직(prophethood)’을 수행할 수 없게 됐을 땐, 그의 사신들(ambassadors, 고후 5:20)이 그것을 대행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말할 때 그의 성령이 그를 증거 해주시므로 그리스도가 직접 말하는 효과를 냈다.

그리고 ‘선지자직’과 ‘제사장직’의 순서는 고착되지 않고 상호교호(Interaction, 相互交互)한다. 상황에 따라 때론 ‘선지자직’이 앞서기도 하고, 때론 ‘제사장직’이 앞서기도 한다(이는 ‘중생’과 ‘믿음’이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것과 같다).

전자의 경우는 ‘논리적 순서’를 따른 것이고, 후자는 ‘실제적 순서’를 따른 것이다. ‘제사장직’을 앞세우는 경우 그리스도가 대속물이 되어(제사장직) 택자를 하나님과 화목시킬 때 ‘그의 대속주 됨’이 그에게 알려진다는 점에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물(제사장직)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 지식’은 단지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아 아는 ‘비인격적 독립적 지식’ 체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삼위일체 하나님과 화목’하므로 알려지는 ‘관계적인 지식’이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가 ‘불가분리’이며 ‘상호교호’하듯, 그리스도의 ‘왕, 제사장, 선지자’ 3직도 그러하다. 셋은 상호의존, 교호(交互)하면서 ‘그리스도의 직무(Offices of Christ)’를 완성한다.

‘죄 사함과 구원’ 역시 ‘그리스도의 3직’의 공역(共役)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죄인이 그를 구속주로 알고 믿으면(혹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믿으면), 그리스도가 자신의 제사장직에 기반한 왕적 권세를 행사하여 죄인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주신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