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7) 값진 진주(眞珠) 비유(마 13:45-46)
(1)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사는 장사와 같다

예수는 값진 진주(the Pearl)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5-46).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값진 진주도 아무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보는 눈이 있는 장사만이 그것의 진가(眞價)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산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비밀에 접하여 그 진리를 아는 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서 진주를 산다. 복음을 아는 자는 복음을 얻기 위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는 헌신(獻身)을 한다.

(2)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얻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는 것이다. 우리의 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예수는 십계명을 어린 시절 부터 지켰다고 자랑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 모든 소유를 팔아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자 청년은 이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부자 청년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실족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될 때 지체 없이 자기 모든 소유를 팔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게 될 것이다. 구원을 재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오는 것이며 이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값진 진주를 산다는 것은 새로운 이윤창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긴박성을 말한다. 다른 사람이 그 값진 진주를 사 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감추어 놓고 몰래 가서 자신의 집을 정리하고 그 모든 소유의 대가를 지불하고 값진 진주가 감추인 밭을 산다. 이것이 복음이다.

8) 그물의 비유(마 13:47-50)
(1) 하나님 나라는 물고기를 잡아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갈라내는 그물과 같다.

예수는 그물(the Net)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7-50).

하나님 나라는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에 비유된다. 그물이 가득 차게 될 때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을 내버린다. 역사의 종말에 신인과 악인의 분리가 있다. 선한 자는 천국으로, 악한 자는 풀무불이 있는 지옥에 던져 넣는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2) 유신론적 이원론

어부들이 던지는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들이 들어 온다. 물고기 가운데는 질(質) 좋은 물고기가 있고 질 안좋은 물고기가 있다. 어부가 그물을 끌어 올려서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안좋은 물고기는 버린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가라지 비유와 같다. 전도와 선교라는 그물은 선인과 악인을 공동체 안에 끌어 들인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함께 있다. 악한 자들을 미리 가려내거나 제거할 필요가 없다. 악한 자를 가려내고 제거하다가 선한 자까지 다치고 어려움을 당할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신 이유는 인간의 판단은 제한되고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악한 자도 어떤 계기를 통하여 회개할 수도 있고 선한 자도 어떤 계기를 통하여 시험에 빠지고 잘못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는 선한 자들의 것이며 악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고 풀무불에 던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신론적 이원론이 예수의 비유에는 핵심사상으로 지배하고 있다.

2. 잃은 것 비유
1) 잃은 양 비유(눅 15:3-7; 마 18:10-14)
(1)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의 기쁨

예수가 들려주시는 잃은 양(the Lost Sheep) 비유는 다음이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3-7).

잃은 양(the Lost Sheep) 비유는 하니님으로부터 소외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누가는 예수가 잃은 사람을 찾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누가는 이 장에서 세가지(양, 은전, 아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주인의 기쁨에 관한 예수의 비유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무리에서 이탈한 양은 잃어버린 양이 된다. 개나 소나 고양이 같은 가축과 달리 양들은 자기 우리를 찾아오는 능력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목자가 양을 찾아와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늑대나 이리의 밥에 되어 버린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을 때 그 기쁨은 너무나 큰 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잃은 양을 찾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복된 소식이다.

(2) 잃어버린 소자 중 하나라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연민

마태복음 비유에서는 누가복음에는 없는 잃어버린 소자 중 하나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첨가되어 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사람들은 큰 자에 대한 관심을 주로하며 지극히 작은 소자를 잃어 버렸을 때 찾으려는 애착이 적고 찾다가 못찾으면 포기해 버린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지극히 작은 소자를 찾은 것에 대하여 크게 기쁘하신다. 비유는 인간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도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저를 지키시고 저를 돌보신다. 심지어는 예수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소자와 동일시 하신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자기에게 한 것이며, 그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자기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작은 자, 소외자, 헐벗은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가치관은 큰 자, 권력자와 부자와 유명한 자를 귀하게 여기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3) 의인 아흔 아흡보다 잃은 죄인 하나의 돌아옴을 기뻐함: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의 죄 때문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 된 것을 원치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긍휼을 베푸신 준비가 되어 계신다. 이미 예언자 에스겔은 죄인을 돌이키도록 하나님의 뜻을 그의 잃어버린 백성 이스라엘에 선포하였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겔 33:11).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하나님은 악인이 죄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악인이 돌이키면 그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 구절은 악인의 숙명론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론을 말하고 있다.

예언자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는 메시아로서 약속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with justice)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 예수는 메시아로서 예스겔이 예언한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목자의 역할을 하신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 23-24).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가지시는 식사행위는 잃은 자들을 되 찾았을 때 맛보는 즐거움의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 곁에 만연한 기쁨의 지상적 광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사면의 표징과 실행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앞으로 맛보게 될 영원한 복락의 선취다.

2) 잃은 은전(銀錢) 비유(눅 15:8-10)
(1)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전승된 비유

잃은 은전(the Lost Coin) 비유는 누가가 유일하게 전승해 주는 예수의 비유로서 다음이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8-10).

잃은 양 비유에서는 한 남자에 관하여 말하는데 잃은 은전(the Lost Coin) 비유에서는 한 여자에 관하여 말한다. 드라크마(δραχμα, drachma)는 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당시에 평민들의 집은 내부에 방 하나만 있었다. 출입문은 하나 있었으나 창문은 없었다. 그리고 바닥은 다진 진훍으로 되어 있다. 방안은 컴컴하다. 은전이 떨어졌을 경우 방안을 밝히기 위해 등잔불을 켜서 빗자루로 집안을 쓴다. 그리하여 잃은 은전(銀錢)을 찾아낸다.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동전을 찾았을 경우 여인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품삯을 찾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즐거움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기뻐하는 것과 같다.

(2) 잃은 죄인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의 즐거움

 한 여인이 잃어버린 방바닥을 빗자루 쓸면서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발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찾다가 찾아내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서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고 기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이 기뻐한다.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예수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천사들이 기쁨을 드라크마 하나를 잃고 부지런히 찾다가 찾으면 즐거워하는 한 여인의 즐거움에 비유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어느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소외된 자들을 찾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종교 특권층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 나병환자들, 혈루병자들(요 5:3),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등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고 소외된 자들을 고치고 저들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율법에 입각한 가치관이 아니라 복음에 입각한 가치관을 교훈하고 있다. 인간들은 죄인을 멸시하고 의인을 칭송하기를 좋아하고 의인의 친구가 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와 창기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고 이들이 바르고 건강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계속)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