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 예수교와 바울교 구분하는 입장
예수 상품화, 구원론 교리화·신학화했다고 주장
하지만 예수님 제자들 바울 이단자라 하지 않아
베드로와 예수 제자들 사이, 신학충돌은 없었다

바울
▲영화 <바울> 중 한 장면.
2021년 새해를 맞아, 브니엘신학교 총장 최덕성 박사님이 지난 2015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교회사 속 주요 인물들을 조명한 작품 <위대한 이단자들> 속 주요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지난 회에 이어 ‘바울’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기독교 관점에서의 이단이 아니라, 이단으로 몰리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지켜낸 인물들을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당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단’으로 불렸듯 말입니다. -편집자 주

3. 바울과 베드로

전도자에게는 재정 후원이나 자립이 중요하다. 바울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술과 장사하는 법을 배웠다. 삶의 불확실성에 붙잡혀 웅크려 있지 않았다. 자립과 생존에 필요한 해결책을 찾았다.

수요가 많은 천막을 만들었다(행 18:3). 천막이 낡으면 몇 해마다 교체해야 하므로 천막 수요는 계속 있었다. 천막을 수리하기도 했다. 천막 제조와 수리 작업을 하면서 고객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 같다.

바울이 이상할 정도로 큰 글자로 서신을 쓴 까닭은 자비량 선교에 필요한 노동 작업을 하면서 생긴 근육질 어깨와 굳은 살 배긴 강한 손 때문으로 보인다.

바울은 계시를 받은 복음 진리의 확실성을 확인할 의도로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다(갈 1:17).

회심 여러 해 뒤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보름 동안 만났다(갈 1:18).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이방인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보름 동안 바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갈릴리 바다 고기잡이 이야기, 장모 소식,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큰 자인가 하고 다투었던 화제 등으로 시간을 소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울에게는 절실하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과연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가? 그 분이 지상에 있는 동안 가르친 것들은 무엇인가? 바울 자신이 계시를 받아 전하는 그리스도의 진리(고후 11:10)는 확실한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바울은 예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알게 되었을까?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구원 진리를 직접적인 특별계시를 통해 알았다.

성령 하나님은 바울이 ‘다소 대학교’에서 배운 수사학, 철학, 인문학, ‘예루살렘 대학원’에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배운 율법, 구약성경을 완벽하게 꿰뚫어 이해하는 능력 등을 유기적으로 이용하여 서신을 쓰도록 영감을 주고 인도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따라 기독교 진리 체계를 정리하는 데 사용되게 했다. 바울은 베드로를 만났을 때 자신이 말하는 것과 베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확히 일치하는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울은 자기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심오한 진리를 자신이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베드로는 바울이 궁금해 하는 것들 중 일부를 해소시켜 주었다. 바울 설교의 주요 부분인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과 도덕적 가르침을 알려주었다.

예수께서 전도 사역에 완전히 헌신했고, 인내(살후 3:5)와 충성(갈 2:16, 22)으로 무장했으며, 정치적 힘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약속 실현에 항상 적극적이었던 점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고후 1:19).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 내용과 베드로가 알려준 것들이 일치하는 사실에 고무되어, 이방인 전도 사명에 열정을 불태우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

바울은 베드로가 보여주지 않는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다.

바울은 진리를 생생하게 설명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졌다. 나무에 달려 처형당한 승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갈 3:1).

둘째, 기독교와 유대교의 근본 차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때까지도 메시아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 뒤에 곧장 복음의 핵심을 꿰뚫어 이해했다. 구원자 그리스도의 죽음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설파했다.

“나를 사랑하여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갈 2:20)”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지려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갈 1:4). 하나님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희생을 치렀다. 대속제물, 화목제물이 되었다(갈 2:20)고 했다.

셋째, 예수 십자가 도리를 설명하면서 도입하는 하나님의 작정, 예정이다.

하나님의 이타주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작정과 예정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했습니다(살전 5:9)”.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고 택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했습니다(엡 1:11)”.

또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로 미리 정한 것입니다(엡 1:4-5)”라고 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주지(主旨)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로 연결되고 종결됨을 확인했다. 그는 유식한 지혜나 심오한 지식을 전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빌 2:8, 고전 2:1-2)를 전했다.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했습니다(골 1:19-20)”.

바울은 핵심을 간명하고 명쾌하게 파악하고 설명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려 대속적 희생을 치른 예수를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 믿으면, 하나님과 화해되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으며, 그때 성화의 삶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 중재자이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 뿐인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쳤습니다(딤전 2:4-6)”.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고 우리를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준다(빌 3:9).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갈 3:11)고 했다.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 곧 하나님과 사람이 화해하는 방법이 율법을 지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율법을 맹목적으로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갈 2:16).

이방인이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갈 3:8).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부동의 선물이지만,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거룩한 열매를 맺는 투쟁의 삶이 따른다고 했다(갈 5, 6장).

바울이 전한 예수 복음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이 이해한 것과 불일치했으면 제자들은 즉각 바울을 ‘적그리스도, 다른 복음, 거짓 교사’로 정죄했을 것이다.

만약 바울이 제자들이 알고 있는 복음과 다른 내용을 말했다면, 당장 이단자로 단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과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보름 동안 대화를 나눈 결과, 바울이 계시를 받아 알게 된 예수 복음과 예수의 제자들이 듣고 목격하고 이해한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차이가 없었다. 불일치, 부조화 되는 내용이 없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처럼,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음을 인정했다(갈 2:7-8). 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이의가 없음을 뜻한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복음의 내용, 사도의 직무, 의무 등 아무런 새로운 제안을 하지 않았다. 바울은 “저 유력한 이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습니다(갈 2:6)”고 말했다.

“기둥과 같이 존중히 여김을 받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주어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했습니다(갈 2:9)”.

예루살렘 공의회는 개종한 유대인 기독인들의 할례를 논의하면서, 이방인의 할례를 반대한 바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바울이 이단자라고 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교와 바울교를 구분하면서, 바울이 종교시장에서 예수를 상품화하려고 십자가의 도리와 구원론을 교리화, 신학화 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을 기독교의 창시자로 본다.

신종 기독교를 자연적 생명(bios)문화 공동체로 이해하고, 바울의 교리에 충실한 역사적 기독교는 영원한 생명(zoe)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신학 사이, 또는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과 역사적 기독교 사이에 존재하는 신학충돌이 베드로를 포함한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4. 복음 전도

바울 메시지의 주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가 인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 설교는 유대인 공동체의 극심한 분노를 격발시켰다.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신 21:23)이며, 따라서 저주 받은 자가 구원자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디옥 지역의 유대인들은 예수신앙 운동인들, 기독인들을 ‘크리스천’, 곧 예수쟁이들이라고 비하했다(행 11:26).

바울은 원근각지로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로마 제국의 동맥 역할을 하는 도로들을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를 하러 다녔다. 예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걸어서 하루 평균 32km(20마일)를 이동했다.

이 거리는 주행 환경, 질병, 상해, 악천후, 노상강도, 이리떼의 습격, 안전조치를 제공할 대상(隊商)을 기다리는 시간을 고려한 수치이다. 당시의 도로 사정, 육상여행, 해상여행, 숙박시설은 열악했다. 여행 길목에서 하룻밤을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바울은 건강하고 강인한 체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혼자 시골길을 여행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래서 실라와 동행했다. 디모데는 바울과 의기투합한 동역자다.

최덕성 리포르만다 12회
▲최덕성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바울의 선교 팀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울은 피할 수 없는 질병인 육체의 가시(고후 12:7)에 시달리면서도, 1차, 2차 선교여행을 강행했다. 유창한 그리스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의 인격에서 묻어나오는 감화력이 문화적 차이를 가진 자들과의 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밤, 바울은 신비로운 영상을 보았다. 마케도니아의 한 남자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행 16:9-10)” 하고 외쳤다. 아시아의 끝인 지금의 터키 서쪽 지역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면 유럽이다.

빌립보는 아시아에 가까운 유럽 도시이다. 바울은 유럽인들에게 예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복음전도를 하는 거룩한 갈망을 가졌다.

바울의 복음전도 활동은 험난했다. 감옥에 갇히고 여러 차례 매를 맞았다. 죽을 지경에 이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40대에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

몽둥이로 세 번 맞았다. 돌에 맞아 죽음 직전에까지 갔던 적도 있다. 그가 탄 배가 파손당하여 세 번이나 죽을 뻔했다. 하루 밤낮을 꼬박 바다에서 표류했다. 거센 강물의 조류, 강도, 동족, 이방인, 바다가 주는 위험을 달게 받았다.

가짜 교우를 만나 어려움을 겪었다.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다.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추위 때문에 떨었고, 헐벗었다(고후 11:24-27).

법정에 고발도 당했다. 감옥에서 뭇매를 맞기도 했다. 어느 도시에서는 불온분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했다(행 16:22-24). 바울의 로마 시민권은 존중받지 못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 메시지 안에는 소외된 계층 사람들의 형편을 극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작정이 포함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이야기’는 가난한 노동계층 사람들에게 희망과 활력을 주었다.

시 당국자들은 예수신앙 운동이 확산되면 사회구조가 위협을 당하고 기존 질서가 뒤엎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대중의 눈에는 나무에 달린 죄수, 처형당한 자를 ‘신, 구원자’로 보는 게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웠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배계층 사람들과 기존 종교인들은 예수신앙 운동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을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숱한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와 손길을 느꼈다. 성령이 역사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고전 2:4)”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머지않아 영광 중에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거듭되는 고생, 불안, 두려움 가운데서도 순순히 복음전도 사명수행에 투신했다. 흩어진 유대인들, 그리스어권 이방인들, 라틴어권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유한 여성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자주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자,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었다. 루디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었다. 자기의 집을 복음전도의 기지로 사용하도록 내어주었다(행 16:14-15).

복음전도에 헌신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었다. 바울은 여성들의 사역을 격려해 주었다. 기독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음을 확연히 감지했다.

바울의 메시지는 노예들과 노예 가족들과 해방된 자유인들에게 특별한 공감을 얻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구원자 예수’는 역설적 진리다. 죄인을 처형해야 할 구원자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하는 이 진리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희망이 없고 삶을 부정하기 쉬운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피지배층은 바울이 “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후 12:9)”고 한 말에 공감했다. 바울은 지혜 있는 자, 문벌이 좋은 자, 능한 자(고전 1:26)였다.

그러한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겠다(고전 2:2-3)”고 하고,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고 하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은 큰 힘을 얻었다(빌 3:8). <계속>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1장 1부.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