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오래 전부터 인터넷 상에서 십일조(tithe, 十一條) 무용론이 확산되고 있으며, 그것을 가르치는 유튜버(youtuber)나 글들에 많은 독자들이 모인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대개 ‘십일조’는 구약 율법의 소산이기에, 은혜 시대엔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율법 시대’, ‘은혜 시대’ 구분 자체가 세대주의적이다. 설사 그런 구분법을 용인하더라도, 그들의 주장은 마치 ‘오늘 같은 은혜 시대엔 도덕법(십계명), 주일성수가 불필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십일조는 의무 이전에 특권

‘십계명 준수’나 ‘주일 성수’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증표)이듯, 십일조(tithe, 十一條) 역시 그들의 특권이다. 그들이 전자를 통해 자신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정체성을 드러내듯, 십일조 준수를 통해 그렇게 한다.

이는 그것들이 모두 율법적 규례 이전에 ‘구원의 열매’이기 때문이다(십일조 역시 명시적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 아브라함과 야곱이 이미 드렸다, 창 14:20; 28:22). ‘구원받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선 ‘심판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뜻이고, 하나님 편에선 ‘당신의 소유로 삼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구원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성도는 그 때부터 자신의 목숨, 재물, 사업 등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께 귀속된다. 이는 ‘구속의 원리’인 동시에 ‘은혜의 원리’에서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 죽을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며, 자신의 생명을 비롯해(롬 12:1, 빌 2:17, 계 5:9) 그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귀속시키려는 ‘헌신에의 갈망’을 갖는다.

이런 경향성은 일찍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의무를 뛰어넘어 드린 ‘초월적 연보(supererorgatory offerings)’에서도 목도된다.
마게도냐(Macedonia)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고 …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2-3)” 했다.

어떤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봉헌(눅 21:2, 4)’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려고 3백 데나리온(장정 300인의 품삯) 되는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막 14:2-8).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복음 사역을 위해 그의 토지 전부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놓았다(물론 사단의 미혹으로 그 중 일부를 감추므로 그 의도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행 5:1-3). 이것들은 단지 의무에 기반한 ‘율법주의 신앙’으론 흉내낼 수 없는 ‘은혜의 산물’이다.

그럼 왜 꼭 십일조인가?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귀속시켜도 ‘전체를 다’귀속시킨 것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이미 ‘장자, 초태생, 첫 열매’를 드리면(출 13:12; 23:19) 전 소산(全 所産)을 다 드린 것으로 인정받는 ‘첫 소산 봉헌 규례’를 통해 가르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구원하신 주님! 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그들의 삶에선 하나님을 향한 어떤 봉헌도 없다. ‘십일조’를 말하면 그것은 ‘율법주의’, ‘기복주의’의 산물이라며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 이들을 향해 해 줄 말이 있다. “‘십일조’가 ‘율법주의’ 소산으로 여겨진다면, ‘은혜주의’로 하라.” 누구든 죽을 생명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게 됐다면, 응당 자신을 위해 죽어주신 그 분을 위해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고후 5:14-15).

그리곤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까?’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가 ‘십의일(十一條)만 드려도 하나님이 다 드린 것으로 간주해 준다’는 복음(?)을 듣곤 ‘이런 고마울 데가’라며 막무가내로 그것을 결행하게 된다. 여기에 무슨 ‘율법주의’운운하며 가타부타 하겠는가?

‘십의일(十一條)’도 하나님께 귀속시키지 못하면서 ‘내 생명도 내 가정도 내 사업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읊조리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조카 롯을 구하여 승전보를 안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떡과 포도주’로 영접한 멜기세덱(그리스도를 예표)에게 그가 십일조를 바친 것도(창 14:20) 구속의 은혜에 감읍하여 드린 ‘은혜의 열매’였다.

◈십일조는 성화의 수단

‘십일조 봉헌’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곧 ‘돈의 우상화’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일종의 ‘성화 수단’이다.

주지하듯, 돈은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돈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보며, 가히 돈의 마력(魔力)을 실감한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서 모두 그것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들이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물욕(物慾) 때문이다. 돈이 우상이 되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헌신이 방해를 받는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사람들의 ‘돈(金) 사랑’이 갖다 주는 ‘해악’을 경고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예수님도 ‘물질’이 ‘하나님’과 그 지위를 놓고 겨룰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경고하시며 그것의 우상화를 경계시켰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여기서 돈을 ‘맘몬(mammon, 재물의 신)’으로 표현한 것은(마 6:24) 쉬 ‘돈의 우상화’에 빠지는 인간 경향성에 대한 적시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경계의 말이기도 하다. 마치 미국인들이 그들의 지폐에 쓴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자경문(自警文)과 같다.

이 외에도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돈의 우상화에 빠지지 않도록 많은 경계의 말씀들을 주고 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잠 23:4)”,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여기라(딤전 6:8)”,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딤전 6:17)”.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십일조 봉헌’이라는 보다 강력한 제어 장치를 주어, 돈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막으셨다. 돈이 우상화된 세태에 우리로 하여금 피같은 돈을 하나님께 바치므로 ‘내겐 돈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며, 나는 돈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한다’는 것을 삶으로 고백케 하셨다.

주(週) 중 하루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주일 성수’가 ‘세상으로 향하려는 나를 떼어놓는’ 샌드위치의 ‘소(stuffing)’와 같다면, ‘십일조 봉헌’은 돈에서 나를 떼어놓는 ‘소(stuffing)’ 역할을 한다.

그리고 ‘십일조 봉헌’은 단지 돈에 대한 우리의 애착을 끊는 소극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은혜의 방편이 되게 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the joy of dedicating to God)’을 만끽케 하고, 하나님만이 그의 만족이며 자신이 돈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종임을 확인시킨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찬 102).”

◈십일조의 축복은 하나님을 신뢰한 결과

십일조를 부정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근거는 앞서 살폈듯 그것의 ‘율법주의성(律法主義性)’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의 ‘구복성(求福性)’ 때문이다. 그들의 눈엔 ‘십일조 봉헌’이 일종의 하나님과의 거래 곧 ‘기브 엔 테이크(give and take)’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십일조 봉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돈보다 그것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그들의 ‘인격적인 믿음(딤후 6:17)’에 근거한다. 돈이 하나님이 된 세상에서 ‘돈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그들의 믿음’ 따라, 당신이 그들의 공급자가 돼 주시는 것이다.

이는 ‘주일성수’에 대한 축복 원리와 같은 맥락이다. 구속의 완성일인 ‘주의 날’을 중시하는 믿음, 그리고 ‘시간이 금’인 피말리는 경쟁사회 속에서 금쪽같은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니, 하나님이 쉬임없이 전력질주하는 불신자 보다 더 영육간의 부요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이 ‘은혜’에 기반 하듯, ‘십일조 봉헌’에 대한 축복 역시 그러하다.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에 대한 축복의 약속들도 다 이 ‘은혜와 믿음’의 원리에 기반 한다. 다음 구절 역시 이 관점에서 읽혀야 하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1-12).”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