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기근으로 어두운 상황에 처한 사마리아에서 어두운 집 사이 빛과 함께 들어오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마치 이 영화의 목적을 말해주는 듯 하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컷
본문: 요한복음 2장 18-22절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청하는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시장판이 된 성전을 과감하게 정리하셨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시면서 성전 청결을 시도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성전을 사모하는 열정’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표적만 보여주면 “특별한 존재로 신뢰하겠다”고 표현합니다. 특별한 존재로서 표적을 요청했습니다. 이 배경을 중심으로 ‘성전의 표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표적 요구에 대한 대응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도전적 요구에 답변하십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8-19절)”.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성전 청결에 대해 상당히 놀라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청결하시는 주님의 행동을 보고, “특별하신 분”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구약의 시편 69편 9절에 나오는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는 다윗의 성전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살았던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을 하느라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때문에 그 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그 현장에서 상당히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보다도 성전을 아끼는 분인데, 갑자기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주님은 ‘성전인 자기 육체’를 가리키신 것이었습니다.

영적 무지에 있는 유대인들이 더 오해가 생겼을 것입니다. “성전을 헌다”는 말 자체가 불경스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과감하게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 일으키겠다”는 표적으로 대응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죽으심 예시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모습에서,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매우 특별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존재가 궁금해 “존재를 입증해 보라!”라는 방식으로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때 주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응수했습니다. 엄청난 사건이 되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유대인들은 더 화가 났습니다. 아니, “성전을 파괴하고 재건축하겠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재개발 사업을 위한 철거민원을 넣은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모독하는 망령된 말로 들렸던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주님을 고소하는데 결정적 혐의와 단서를 잡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1절에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公會)가 주님을 죽이려고 그 증거를 이렇게 댔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는 증거를 잡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 말의 뜻을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이해하게 되었다고 성경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3. 주님의 부활 예시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절)”.

“이 성전을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주님의 부활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영적 까막눈인 유대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사흘 동안에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문자 그대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니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는데, 사흘 만에 일으킨다는 말인가?”하면서 더욱 의아해했습니다. 영적인 일은 인간의 경험과 이성적 사유의 한계를 뛰어넘은 영역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성전을 사흘 동안에 일으킨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그 많고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도 몰랐습니다. 부활에 대해서도 수차례 들었는데도 믿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믿지만,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한 행위였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주님의 부활은 모든 것에 해답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 중에 주님의 부활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전이 파괴되어 다시 사흘 만에 눈부시도록 빛나는 성전이 회복되는 승리의 영광입니다.

김충렬
▲한국상담치료연구소에서 만난 김충렬 박사.
4. 정리

남이 알지 못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적인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사람은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영적인 뜻을 이해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소서.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믿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죽은 후에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