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이(The Wound)’라는 필명의 그리스도인이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코너로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갑니다. 범상치 않은 글솜씨로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주요 이슈들을 쓴소리와 함께 성경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대안을 모색해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유교적 인간관으로 혈육만 중시하던 우리 민족
남의 자식, 내 자식처럼 여기는 입양 DNA 적어
버려진 아이들, 먼저 키우려고 줄 서는 날 오길

정인이 정인 양
▲기독교인 양부모의 학대로 죽음에 이른 정인 양의 입양 전후 모습. ⓒ유튜브

정인이의 죽음을 듣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밥맛도 잃고 마치 제 손으로 그런 것처럼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나고 한 마디 말조차 꺼낼 수 없었습니다. 특히 공포에 젖은 눈길로 두 손으로 유모차를 꼭 잡은 CCTV 속의 정인이 모습이 아련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인간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와 자괴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이를 지키고 살리지는 못할망정, 그 순수한 결정체인 아이를 고의로 죽게 만든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입니까? 대체 그 여인은 인간이긴 한 것입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도 아프고 눈도 아픕니다.

성경은 인간을 일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 했습니다. 이를 두고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1938-2000)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인격적이고 도덕적이며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은 위대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을 능가하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이 그러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경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과 추악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상세하게 보도합니다. 특히 창세기 1-11장 사이에는 타락한 인간이 짓는 뚜렷하고 특징적인 죄악들을 4가지로 고발합니다.

선악과 사건(창 3장)은 육신의 정욕에 눈이 멀어 약속을 어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인의 살인(창 4장)은 인간의 시기와 미움의 실체를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연모하여 연합한 사건(창 6장)은 거룩과 거룩하지 못한 것의 혼합이 주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벨탑 사건(창 11장)은 인간의 자고함은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반역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처참한 심판의 결과를 맞이한다는 교훈을 남깁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무수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인간은 한 번도 개선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두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도르트 신조(Dort Creed, 1619)를 통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Total Depravity)”고 정했습니다.

이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가장 잘 묘사한 분이 있다면 유명한 개혁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 1913-1988)일 것입니다. 그는 타락한 인간을 ”날 수 없는 날개를 가진 새“에 비유했습니다. 즉 인간의 껍데기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어버린 실체라는 것입니다.

영적 기능을 상실한 인간이기에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육체적인 존재로 전락하여 살아 숨 쉬는 동안 이 땅에서의 삶을 누리고자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이 발버둥은 오직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의 몸짓입니다. 심리학자 안나 프로이드(Anna Freud, 1895-1982)는 이것을 ‘자기방어기제’라 하였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우선시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기를 보호하는 존재라 합시다. 그렇다고 남을 해롭게 하고 다른 이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죽이어 자기를 보호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귀찮고 괴로운 일이 있다 해도 그 누구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생명체를 해하거나 살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는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분노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의 양모는 죽을 때까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죄 용서를 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분노를 쉽사리 수그러들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을 두고 얼마나 많은 슬픔과 분노와 저주의 소리들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많은 여성들이 “내가 정인이 엄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형에 처하라”고 고함을 칩니다. 얼마나 슬프고 분노했으면 저들의 입에서 저렇게 피맺힌 절규와도 같은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입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뉴스를 보다가, 정인이의 죽음을 두고 소리치는 얼굴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정인이는 부모에게서 버려져 홀트아동복지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지금의 양부모에게로 보내졌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바로 이 시간 동안 우리는 버려진 정인이에 대해 무엇을 했을까요? 분노의 뒷면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 것인지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버려지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어느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꾸리고 사는지,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관심을 두고 살았을까요?

한 번이라도 버려진 정인이를 내가 키우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을까요? 내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철저히 남의 자식으로 여기는 이 사회 풍토에서, 지금도 정인이는 태어나고 버려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민족은 거의 5천 년 동안 유·불·선에 지배되어 살았습니다. 특히 유교적 배경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국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유교 정신은 철저히 인간관계 중심의 철학을 펼칩니다. 무엇보다 혈육을 중시하여 조상과 후손의 연결고리를 이어가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한국인들은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여기는 입양의 가치관을 소지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내 몸에서 태어난 자만이 자식이라는 가치관에 함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 ‘내 자식’입니다. 이것이 입양 후진국인 한국의 현재 모습이기도 합니다.

2010년 캐나다 토론토의 한 시골 마을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한 백인 여인이 흑인 여자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두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감격했습니다. 서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그 따뜻한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버려진 아이들을 내가 먼저 키우겠다고 줄을 서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게 될까요? <계속>

다친 이(The Wou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