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그리스도가 소외되는 것을 자주 목도한다. 심지어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교회들에서까지도 그러하다. ‘하나님 주권, 하나님 영광’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강조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선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성령’의 홀대로 이어지며,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결핍’을 초래한다. 이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요 15:26)이다.

물론 ‘그리스도 중심’이 풍유주의자들(allegoricists)처럼 문맥, 단어 하나하나를 알레고리칼하게 그리스도와 연결지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 ‘그리스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교와 가르침이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예로 든다면, 첫째가 “이 성경이 곧 내게(그리스도께)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는 예수님 말씀처럼, ‘성경의 기록 목적’이 그리스도를 가르치는데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그들의 경전(Tanakh, 우리의 구약 성경에 해당)을 열심히 상고했음에도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이 결여되고 영적 우맹에 빠진 것은(마 23:17), 그리스도(눅 24:44) 없이 그것들을 읽은 때문이다(요 5:40).

스펄전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왜 당신은 그리스도와 직접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성경을 설교할 때도 꼭 그리스도를 언급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강(江)의 모든 작은 지류(支流)가 원류(原流)에서 근원하듯 성경의 모든 세세한 내용이 원류인 그리스도로부터 발원되기에(요 5:39), 설교자는 모든 성경을 말할 때 그것의 원류인 그리스도를 말해야 한다.”

둘째, 죄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데 그리스도 없인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삼위일체적’으로만 알려진다는 전제의 발로에서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의 ‘그리스도(Christ)의 3직’ 중 ‘선지자직(prophethood)’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직이다(그리고 이 선지자직은 그의 제사장직(priesthood)과 맞물린다. 그가 ‘화목제물(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킴으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보게 된다).

셋째,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없인 그것의 획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조’도 그 중 하나이다.

유대교도들(Judaists)은 창조 기사를 담은 ‘토라(Torah)’ 그리고 ‘탈무드(Talmud)’를 비롯해 창조에 관한 많은 ‘랍비 문서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주된 칭호가 ‘창조주(Creator)’일 정도로 창조에 올인했음에도, 올바른 ‘창조지식’을 갖지 못했다.

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창조 지식’의 결핍이 ‘물질 창조의 완성일’인 ‘제7일 안식일(The seventh-day Sabbath)’을 고수하고 ‘구속의 완성일’인 ‘주일(Lord's day)’을 거부하게 했다. ‘창조’와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마 12:8)가 배제된 데서 온 결과물이다.

이는 단지 성경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문자적 ‘창조 기술(記述)’을 읽는다고 ‘창조 지식’을 가질 순 없다는 말이다. 구속의 은혜를 입어야만 ‘하나님’도 ‘그의 창조’도 이해할 수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는 종교심리학자들이 곡해한 ‘인식론적 믿음’, 곧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로 믿자. 그러면 그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의 장벽이 철거되니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더불은 ‘창조의 동역자(계 3:14)’인 동시에 ‘그것의 계시자’이다.

이 점에서 ‘구속의 지식’은 ‘창조의 지식’에 선재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론 ‘창조’가 먼저이지만 ‘영적’으론 ‘구속’이 먼저이다(엡 1:4).

따라서 타락한 죄인이 ‘천지창조’를 알려면 성경의 맨 첫 번째 책인 ‘창세기’보다는 뒤의 ‘복음서’를 먼저 읽어야 한다(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창세기부터 읽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은 하나님 중심과 배치되는가?

‘하나님 중심’을 신학의 기저로 삼는 개혁주의 진영에선 ‘그리스도 중심’을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강조하다가 ‘하나님 중심’에 손상을 줄까 혹은 ‘바르트주의자(Barthists), 예수주의자(Jesuists)’로 오해받을까 해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이 곧 ‘하나님 중심’의 훼손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오래된 전제 때문이다. 올바른 ‘삼위일체 개념’ 안에 들어오면 ‘성부, 성자, 성령’의 차등 개념이 극복된다. ‘삼위의 차등 개념’은 ‘삼위일체 밖’에 있는 자의 ‘관찰결과물’이다.

그런 관찰자들 중 신본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들은 ‘삼위일체 신학’을 표방하면서도, ‘성부’를 독점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그들의 ‘하나님 중심’ 표어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보다는 ‘성자’와 ‘성령’이 배제된 유대교적 ‘단일신 하나님 중심’처럼 보인다.

삼위일체에 대한 무지는 다양한 오해들을 낳았다. 그 중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를 취하는 것을 삼위(三位)의 계급적 차등으로 오해한다.

이런 오해로 인해, 목사가 축도할 땐 ‘성자’를 앞세우는 것에(고후 13:13) 의아해 한다. 예컨대 ‘성부가 제일 높으신데 왜 성자를 먼저 앞세우느냐’는 것이다.

그 외에 삼위의 차등을 두는 듯한 성경 표현들을 대면할 때 생기는 오해도 있다. 성경이 ‘성자’가 ‘성부’의 뜻을 받드는 자로,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명령 이행자’로 묘사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는 ‘삼위(三位)의 계급적 차등’을 말한 것이 아니며, 단지 삼위의 직임과 경륜상의 구분 일뿐이다. 어떤 경우엔 서로를 높이시려는 ‘겸양의 표현’일 때도 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7)”는 ‘성자는 성부보다 낮은 지위에서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성자의 희생’이 강요나 의무에서가 아닌 ‘택자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

일견 성부는 ‘영광의 수납자’이시고 성자는 ‘영광의 봉헌자’처럼 보이는 말씀들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성자로부터 영광을 수납한 성부는 그것을 혼자 독점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돌리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무릎을 그의 이름에 꿇게 하셨고, 그를 주라 부르게 하셨다(빌 2:9-11)”.

‘성자’가 택자를 자기 피로 사서 ‘성부’께 드리셨을 때도(계 5:9), ‘성부’는 그들을 독점하지 않으시고 ‘성자’에게로 돌리셨다(요 17:6, 계 14:1).

‘성령’ 역시 ‘영광’에 있어 ‘성부와 성자’에 못지 않으시다. 성도를 거듭나게 하고 구원을 적용시키며 성화의 사역을 행하시지만, 친히 성자와 성부의 영광을 현현하시며 성도 안에 내재하시면서 그들을 소유하시는 영광도 취하신다.

결론을 삼을 만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려 한다. 오래 전 어떤 목회자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에 있어 순서상 ‘성부’가 먼저인데, 왜 축도할 때 ‘성자’를 앞세우는가’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생각된다. ‘축도’에서 그리스도를 앞세운 것은 성자를 성부보다 높여서가 아니다.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조우하는 접촉점이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시복(施福)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강하(descending, 降下), 인간으로부터의 상승(ascending, 上昇)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이는 삼위일체의 다른 경륜 때엔 ‘성부’ 혹은 ‘성령’이 전면에 포진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직임과 역할’에 있어, 그때 그때의 ‘한 위(位)’ 혹은 그 이상의 ‘위(位)들’의 도드라짐이 있을 뿐, ‘지위’와 ‘영광’엔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