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영화 <바울>은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의 감동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영화 스틸컷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사회학 및 비교종교학 교수로, 신학자가 아니다. 그런데 그가 쓴 <기독교의 발흥>은 대단히 유명한 역작으로써 기독교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주고 수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책이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 기독교가 어떻게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는가를 매우 깊이 연구하였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많이 없었고, 무수한 박해를 당한 시대였다. 기독교가 공공의 적이 되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때에 어떻게 매년 30-40%의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사회학이라는 ‘객관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다. 관점이 서로 다르겠지만, 필자의 취향에 맞추어 몇 가지를 생각해본다.

첫째, 회당 중심의 선교 활동이 부흥의 초석이었다.

바울의 선교 활동은 어느 지역을 가든지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이뤄졌음을 성경에서 쉽게 찾아보게 된다. 맨 땅에 헤딩한다는 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당시 유대 회당은 유대 역사와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고 교육하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을 통해 많은 강론을 하고, 회당을 중심으로 이방인들에게 나가는 교두보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 중심’의 신앙을 외치는 근간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말은 교회 생활을 통해 진리의 본질을 이해하고,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변화의 주체가 되는 의미에서 교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작금의 교회 형태, 즉 교회를 무너뜨리는 세속화, 대형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발상, 다툼으로 인한 종교적 권위 실추, 영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교회 중심은 아닌 것이다. 오늘 이러한 결과는 교회 중심이 가져온 역설이라고 본다.

교회 중심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의 핵심’으로 살아가는 ‘기독교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공동체의 기본은 ‘공유 정신’이다. 신앙도, 행복도, 물질도 서로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관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다.

둘째, 관계중심 전도가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선교사들이 길거리에서 외치고 전도지를 나누는 일은 1천 명 중 한 명이 반응할까 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다면, 초대교회는 관계중심 전도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다.

베드로의 설교로 단시일에 3천, 5천이 회개하는 특별한 역사를 제외하고, 친구, 가족, 주변의 환경을 통해 대부분 개종이 이루어진다. 교인들 간의 긴밀한 친교의 끈, 친밀한 애착관계를 통한 전도와 성장이 대부분을 이룬다.

사회의 네트워크가 상호 이해와 이익을 바탕으로 한다면 기독교인의 애착관계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끼리끼리 형태를 벗어난 ‘개방형 네트워크’를 형성할 때 집단 회심이 일어나기도 한다.

실례로 모르몬교는 지난 1세기 동안 40%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교인은 주로 가족, 친족, 친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애착관계 네트워크가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사회에 대한 봉사이다.

당시 3-4세기 당시 사회의 모습은 도시 빈민으로 가득한 상태, 고아와 과부, 폭력적인 인종 분쟁, 박해, 역병, 화재, 지진으로 인해 매우 힘든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대 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은 매우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발생한 역병으로 인하여 수천명의 인구가 몰사하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도망치고 회피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기독교인들만이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돌보았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황제의 칭찬도 매우 두드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로 황제가 감동하고 그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태도가 완화되고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는 기록은,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타산지석이 되는 일이다. 영향력이란 ‘높은 윤리의식과 도덕’을 기반으로 한 ‘섬김’과 ‘헌신’속에 나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헌신이 오직 교회 내에서 목사를 섬기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초대 기독교인들의 헌신은 사회를 향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향한 섬김과 헌신이었다. 오늘처럼 거대한 예배당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 속에 갇힌 믿음이 될 수가 없었다.

믿음의 헌신과 봉사와 섬김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닌가? ‘너희들 끼리끼리’ 섬기고 봉사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웃과 대사회를 향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은 고통과 외로움 중에 절망하고 있고, “와서 도와 달라”고 외치고 있다.

오늘날 고난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향한 시험이 아닐까? 기독교가 다시 한 번 살아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기회는 늘상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신하고 섬긴다면, 무너져가는 교회의 회복을 다시금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개인주의적 개교회주의만 벗어날 수 있다면, 몇몇 교회가 연합하여 얼마든지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를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하심이 아닐까?

우리가 나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통해 자기의 일을 이루어 가시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이들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을까 모르드게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