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자연 폭설 함박눈 겨울
▲1월 17일 눈이 내린 모습. ⓒ크투 DB
1. 새해가 되어 벌써 스무 날이 가깝게 지나갑니다.

올해 들어 세 번째 펑펑 하얀 눈이 대지를 덮었습니다. 유독 올 한 해 눈이 많이 내립니다. 대체 왜 이렇게 눈이 많이 오냐고들 이야기합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눈이 싫답니다. 어른들은 눈이 오면 금새 더러워진다고, 또 치워야 한다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다릅니다. 카페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눈사람 만들었니?”라고 물으면 “네, 지금 만들고 지나가는 길이에요”라고 말합니다.

모든 아이는 좋아하는데 어른들은 싫어하는 눈, 어른들도 아이었을 때는 좋아했을텐데, 사랑받았던 존재에게 버림받은 존재.

그런데도 눈은 하염없이 다시 내립니다. 어떤 이유로 이 땅에 내리는 것일까. 구름 속 물의 입자 중 수증기가 고체화된 기상 현상이라는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이야기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 차가워졌습니다.

2. 저는 눈이 좋습니다.

휠체어로 다니기에도, 목발로 잘못 짚으면 그대로 미끄러져 넘어져 버리지만, 그래도 눈이 좋습니다.

정말 잠시지만, 눈이 내리면 그 찰나의 순간이라도 온 땅이 하얗게 뒤덮여 그것만으로 마음이 설레입니다.

잠시라도 덮어줌. 그 잠시의 순간이 사라진 요즘은 잠시라도 드러냄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잠시라도 상대를 헐뜯고 싶어, 치부를 드러내는 요즘, 잠시라도 내 자신의 이력을 드러내야하는 요즘, 그래서 저는 눈이 좋습니다.

3. 눈은 하늘에서 내립니다. 그런데 눈이 가는 길은 땅입니다.

‘내 자리는 위에 있어!’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아래로, 내가 가야 할 길은 땅이라고. 아래로, 아래로, 사람들이 밟아 더러워진 저곳 그곳으로 자기 온 몸을 던집니다.

그렇게 온 몸을 부딪히는 눈이 좋습니다. 잠시라도 높아지려고 아등바등, 하나님이 주신 길을 거꾸로 가려 하는 세상에서 눈은 제게 반성을 하게 합니다.

4. 내리는 눈은 모두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수없이 많은 눈송이 어쩌면 저마다 이름도 있겠지 싶습니다. 그들 모두 연약해 바람불면 이리저리 휘날립니다. 그러나 대지 위에 뒤덮인 그들은 누가 나이고 너인지 모르는 하나가 되어 이 땅을 덮습니다.

더 큰 눈 작은눈 알아볼수 없게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연약함을 뒤덮는 하나됨은 내가 나됨을 주장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5. 하얀 자기 몸, 대지 위의 쓰레기와 부대끼면서 “눈이 오면 지저분해져” 소리 들어야 하는 존재. 자기 존재 가치가 하락됨에도 세상의 오물을 씻어가는 존재 앞에 참 작아보이는 저입니다.

6. 눈이 와서 왜 이렇게 더럽냐고 투덜거리며, 눈이 와서 왜 이리 길이 미끄럽냐고 투덜거리는 중, 문득 지나가던 길 위에 누군가가 만든 조그마안 눈사람을 보면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잃어버렸던 사랑의 마음을 되새기게 만드는 눈은 그렇게 다시 태양빛이 떠오르면 사르르 녹아 물이 됩니다.

7. 누구나 따뜻함을 원하는 겨울입니다.

누구나 “저도 사랑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내리는 눈, 한 분 고이 모셔놓고 싶어 손바닥 위에 올리고 이야기할라 치면 그 사이 사라집니다. 나는 한때 눈이었노라고 말하면 안되는 사명이라도 있는 듯, 자기를 지우는데 적극적입니다.

홀로 메마른 대지를 덮어주는 이불처럼 되더니 스르르 녹아 물이 됩니다. 어떤 곳에 가도 그곳의 모습을 보여주는 물이 됩니다.

나를 드러내고 너를 짓밟으라는 세상에서 나는 사라지고 너의 모양을 보여주는 ‘눈’이 ‘물’이 되는 이야기에는 그래서인지 ‘눈물’이 있습니다.

8. 자신의 온 몸을 헝클어트리고 짖이겨지며 네가 원하는 모양대로 바꾸어주는 존재로서 휘청거리면서도 하염없이 내가 갈 길은 저기라고, 그러면서 간 곳은 메마르고 차디찬 갈라진 땅.

그러면서 한 일은 그들을 덮어주는 일, 온통 하얀 몸이 인간이 만든 오물로 뒤덮인 순간, 마지막까지 물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 속에서….

9. 세상이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란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구현하는 것일까? 나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10. 왜 이렇게 추운 겨울 눈마저 이리 자주 오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사는 세상이 서로를 덮어줌을 잊었기 때문은 아닐까? 모두 높아지려고 그래서 낮은 곳은 점점 메말라가는 이유는 아닐까? 흘러가려 하지 않고 고여 썩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2021년은 ‘신축년’이라고 합니다. 신축의 신은 하얀 것을 의미합니다. 소는 충성을 상징합니다. 우직하고 고집스럽게도 울면서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 벧세메스로 걸어갔던 암소의 길이었습니다. 신축년, 하얀 소의 해.

11. 현재 저희 교회는 사역자 세 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예배팀 10명 가까이 모이던 인원이 있었지만, 정부의 규칙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 있습니다. 더 줄여 조심해서 코로나에 안걸리려고 하는 1차원적 의도는 아닙니다.

사실 예배를 대면으로 드릴 수밖에 없는 연로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 몇몇이라도 안전히 모여 예배드릴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이들을 최소화한 것이 출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줄이고, 그렇게 내려가다 보니, 더 큰 이유를 발견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19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예배마저 20명 이하로 드려야하는 이유가 뭐냐고, 교회 규모에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고, 식당은, 카페는, 다른 상업시설과 왜 차별하냐고 주장합니다. 왜 정부가 예배를 방해하냐고 말합니다.

모두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왜 큰 교회도 스무 명 작은 교회도 스무 명, 왜 다른 시설과 다른 잣대를 들이대며 교회를 탄압하느냐고, 이에 대해 정부가 합리적 이유를 대면 즉각 중단하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고도 합니다. 사역이 중단되어서야 되겠느냐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라도 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바로 저 때문에, 그리고 우리 때문에 당하신 모진 고난과 핍박…. 그럼에도 한 마디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구해야겠다고 하신 주님을 발끝이라도 닮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12. 주님의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럴수록 우리 옳음을 주님께 맡기고 더 내려갑시다. 더, 눈처럼 그저 내려가 봅시다. 연약해서 할 수 없다고 그럴수록 눈을 바라보며 낮은 곳에서 만납시다.

더 낮은 곳에서 만나 하나 되어 이 땅을 덮어봅시다. 이 땅의 더러운 모든 것을 우리 한 몸으로 덮어줍시다. 십자가의 피로 온 몸이 더러워졌듯이 우리도 옳음을 드러냄이 아니라, 잘못됨을 덮어주는 십자가의 사람. 눈같은 사람이 되어봅시다.

문득 꿈도 사랑도 무엇인지 잃어버린 누군가에게, 깨달음이 기쁨 되는 삶이 되십시다. 더러워진 대지 위의 눈사람을 보며 사랑을 깨닫듯, 반드시 잃어버린 영혼 한 사람이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나를 드러냄이 아닌, 타인을 드러내게 해주는 물이 되어봅시다. 그곳에 주님의 눈물이 있을 줄 믿습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