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아 미안해
▲최근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기독교인 가정의 영아 학대 사망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 ⓒSBS 캡처
1. 최근 정인이 사건을 접하면서, 특히 아이를 키우거나 키웠던 이 땅의 어머니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몹시도 마음이 힘들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고, 또 아무리 잘 키우려고 노력을 해도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 엄마가 된 이들로선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와 자책감으로 눈물의 기도가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종종 주어지곤 한다.

그런 상처나 회한은 더러 아이들이 커서도 마음 속에 남게 되어, 서로의 화해와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과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여러 자녀를 둔 가정들이 적은 요즘 시대엔 언니나 형과 동성인 형제가 있는 가정들이 많지 않아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한 번쯤은 입양을 생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동생이 있는 친구가 부러운 어린 애들은 동생을 슈퍼마켓에서 사오라고 엄마에게 졸라대기도 한다.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론 입양은 양부모에게 아이가 없을 때 첫 아이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엄마에게 첫 아이가 태어난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감동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엄마에게 첫 아이와의 애착 관계는 둘째 아이보다 더 강할 소지가 많은데, 그런 상황에서 터울이 적은 입양은 매우 불안하게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둘째가 태어나면 터울이 적은 첫 아이는 큰 혼란과 상심을 겪게 된다. 터울이 많으면 큰 애가 동생을 귀여워하고 돌보아줄지 모르지만, 네살 미만의 터울일 경우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다 새롭게 등장한 경쟁자와 이를 나눠가져야 하는 첫째로선 보통 시련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생을 다시 갖다주자고 떼를 쓰는 경우마저 생긴다. 그런 경우 큰 아이의 상심한 마음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는 엄마의 마음은 난감하고 애석하기 그지없다.

친자든 양자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도 소중한 미션이므로, 입양을 생각할 때는 입양의 여건과 동기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첫째 아이가 있는 경우 입양은 엄마가 둘째 아이를 새로 낳는 각오로 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마트에서 첫째 아이가 가지고 놀 장난감 사듯 놀이 상대를 구하는 정도로 수월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임이 아닌 경우 첫째와 놀아줄 동생을 낳을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엄마에게도 충분히 있는 셈인데, 한 아이로 출산을 끝내고 싶다면 그 이유를 누구보다 아이 엄마인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에 사실 입양 자격의 유무가 거의 판가름되는 셈이다.

첫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몹시 힘들었다면, 더군다나 입양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아이를 또 낳아 기를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아이에게 더 나은 환경을 선물하기 위한 욕심에 다른 한 생명을 손쉽게 데려올 수 있다 생각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이미 한 생명에 대한 죄를 잉태한 것이다. 다른 존재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될 경우, 그 존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입양 기관에서는 심리검사 외에도 입양 부모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입양 목적의 진의를 잘 파악해야 한다. 아동 학대는 제도적 장치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독특성이 있고, 한 가족이라도 얼마든지 학대 현장이 은폐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피해 대상이 너무도 작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어린애는 말을 못할지라도 생각 외로 놀랄만큼 엄마가 자기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의 정도를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잘 인지한다. 더구나 보육원에서 살던 아이가 새 환경에 적응하려면 얼마나 큰 혼란과 불안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이겠는가? 그런 아이를 더군다나 수없이 구타하고 병든 아이를 ‘진상’이라 표현하고 정이 안 간다고 했다니 너무 상식 밖이다.

둘째를 낳은 심정으로 기르는 입양아를 엄마라면, 두 아이를 돌보느라 자기 몸을 돌보거나 가꿀 정신도 없을만큼 경황없이 바쁘게 마련이다. 그 시기엔 무슨 일을 계획하든 모든 기준이 다 아이 양육과 연관되어 행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엄마가 아이를 안기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2. 정인이 사건은 양부모가 기독교적 가계 환경과 맞물려 있어 더 사회적인 공분과 그 파장과 여운이 짙어질 수 밖에 없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적 직임이나 가계나 혈통적 배경이 결코 참 기독교인의 보증이 되는 건 아니란 사실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이들 중엔 별 고생 없이 유학생활도 하고 비교적 안정되게 구축된 후원적 배경의 덕을 누려온 때문인지, 지식과 능력과는 무관하게 사고력이 깊지 못하고 가해자적 자각이나 피해자의 고통에 의외로 둔감한 경우가 종종 있다. 교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사례에서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어쩌면 이번 정인이 사건은 그간 한국 기독교계의 만연한 세속화로 인해 ‘그리스도의 심장’이 없는 한국식 ‘죽은 복음주의’가 빚은 참사인지 모른다.

교회 리더들의 부적절한 특권 의식과, 대상을 도구화하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부당하고 야합적인 이기주의적 집단 문화의 병폐가 배태해온 기만적 위선과 부도덕성으로 인한 총체적 폐단의 표본적 산물인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과는 무관한 기독 종교인들의 부패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즉 지성이 파악하는 양식에서 표현되는 미흡하고 위태롭기 그지없는 넌센스적 서술에 의한 다른 예수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참 예수님의 자리를 내어주는 재앙을 초래하는 비극을 자초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이 땅에서 친부모와 똑같은 심정을 가지고 사랑과 인내로 입양 자녀들을 양육하는 입양 가정과 입양기관에 큰 누를 끼치는 결과를 결코 초래해선 안 될 것이다.

정인이 사건 뉴스를 처음 접하게 된 요 며칠 자꾸만 떠오른다. 무력하고 표현 못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약하고 가진 것 없는 무구한 한 생명의 해맑은 미소도 잠시, 친부모에게서 버려진 후 축복된 돌봄을 기대했던 양부모 밑에서 극히 짧은 생을 처참하고 고통스럽게 마감한, 전쟁고아 보다 더 이를데 없이 불행한 눈빛의 검푸른 멍으로 일그러진 조그만 정인이 얼굴이….

그리고 그 안에서 조용히 천천히 고개를 드시고 바라보시는 그 분의 눈빛, 그 분의 얼굴이…, 십자가 위의 그 모습이….

한편 생각해 본다. 십자가의 주님은 군림하고 명령하고 제압하고 간섭하고 폭력적인–자기 중심적인 존재론의 폐단 때문에 무존재적인 이름으로 윤리를 앞세워야 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는 아닌 분이라고….

오히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의 심령을 깊은 탄식으로 통촉하시고 눈물로 호소하시며 윤리보다 더한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 생명을 살리시고 역사와 매일의 일상 속에 우리와 함께 성령의 현존으로 동행하시는 분이시라고….

또 십자가의 주님은 비인격적이고 비실체적인 사건의 ‘일리야(there is)’-익명적인 무의 심연이나 죽음과 같은 섬뜩한 어두움으로 우리에게 응답의 책임을 지우는 분은 더더욱 아니시라고….

오히려 십자가의 주님은 인격적인 생명의 빛이 되셔서 정인이를 안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어 모든 눈물과 아픔을 씻어주시고 상치 않게 하실 뿐 아니라, 인격적인 계시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마주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레비나스적 응답의 책임감, 그 이상의 “사망은 우리 안에서, 생명은 너희 안에서” 부활 역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라고….

오늘도 이 시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 곳곳 이런저런 학대 속에서 신음하고 낙태와 각종 폭행과 폭력으로 고통받고 스러져가는 뭇 생명들, 저 북녘 땅에서 산으로 물로 벼랑으로 기진하고 허기진 몰골로 생명을 걸고 탈출을 꾀하는 이들, 수용소에 처참하게 갇힌 모든 이들과 그리스도인들, 아프리카의 기아와 질병 가운데 고통받는 아이들과 엄마들, 독거 노인들과 홈리스들과 장애인들과 선교사들, 코로나 바이러스와 병으로 병실에 누운 사람들….

이 모두를 위하여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가 점점 더 무겁게 차오르며 울컥 뜨겁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박현숙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