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믿음은 안경과 같다. 3D(Three Dimensional) 영상을 보려면 3D 입체안경(stereoscopic eyeglasses, 立體眼鏡)을 써야 하듯, 하나님도 신령한 영적 세계도 오직 믿음이라는 안경을 써야 보인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

그런데 ‘믿음’에 대한 왜곡이 많다. 첫째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 그렇다. 그들에겐 ‘믿음’이 ‘환상(a vision), 환청(a voice)’ 등 소위 ‘직통 계시’와 동일시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이는 믿음(직통 계시)’으로 본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신앙하는 것이 ‘믿음’인데, 그들에겐 ‘믿음’이 ‘보고 듣는 것’이니, 이들에게선 ‘믿음’의 고유한 의미는 퇴색되고 ‘믿음의 언어모순’ 현상이 일어난다.

둘째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종교심리학적 믿음’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자신들의 동의’에 의해 ‘하나님이 존재’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실존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신들의 믿음을 중시한다.

만일 지금 자신들이 그 동의를 철회하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되고 그들은 즉시 불신앙으로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제발 자기 마음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전전긍긍한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의식(consiousness)’의 망망대해에서 아무 마찰도 일지 않는 ‘공허한 노젓기(oarage)’, 곧 ‘가련한 의식화(conscientization)’에 불과하다. 설교자의 임무도 설교를 통해 그것을 도모해 주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부러운 신앙은 뭔가 있어 보이는(There seems to be something) ‘직통 계시’ 신앙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공허한 ‘무신론적 실존주의’, ‘자유주의 신앙’이 ‘신비주의’와 손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운 ‘성경적인 믿음’이 있다. 그들의 신앙엔 실체적 대상, 곧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과 ‘성령’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의 노젓기(oarage of faith)’는 ‘부딪힘(encounting)’과 ‘성령의 파장(wavelength of the Holy Spirit)’이 있다.

◈실체 있는 믿음

콜럼버스(Columbus, 1446-1506)가 ‘미지의 신대륙’을 향해 닻을 올린 것은 ‘허구적 신념’에서가 아닌, ‘지구는 둥글다’는 ‘과학적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지구는 둥글고 수평선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그의 과학적 확신이 그로 하여금 그곳을 향해 항해를 결행하도록 했다. 만일 지구가 네모졌다면 그가 수평선 너머에로 항해한 것은 목숨을 건 무모한 도전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기독교’ 역시 실재에 기반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죄사함, 구원, 영생, 천국, 창조 등’에 대한 믿음은 실재에 대한 수납이다.

실존주의자들이 그들의 논증을 위해 자주 쓰는 비유가 있다. ‘음식이 있기에 그것을 채워 줄 위장이 배고픔을 느끼고’, ‘이성이 있기에 이성을 그리워한다’이다. 이는 한 번쯤 되새겨볼 만 하다. 나는 ‘실존주의자’는 아니지만 이 점은 일정 부분 공감한다.

우리가 ‘하나님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소망’이 있는 것은 ‘소망의 대상’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소망은 구름을 잡는 것 같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실상(the substance, 實相)’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망에서 믿음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논리적 근거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는 말씀을 채용한다.

그들은 어떤 것을 간절히 소망하다 보면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으로 소망을 추구해 나가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구복주의, 신념주의 교인들의 전형적인 신앙 형태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정 반대이다. 믿음에서 소망이 나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는 말씀을 ‘그리스도를 믿기에 소망이 생긴다’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를 믿으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상’인 구원, 영생, 천국을 소망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과 화목하니 그 동안에 보이지 않던 영적 세계가 열리므로, 그것들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는 가질 수 없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겐 기껏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보이는 소망(롬 8:24)’만 있을 뿐이다. 성경은 죄인이 거듭난 후에라야 비로소 소망다운 소망 곧 ‘산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믿음을 일으키는 성령, 성령을 일으키는 믿음

‘믿음’과 ‘성령’은 상호 의존돼 있다. ‘성령’은 믿음을 주는 ‘믿음의 영’이며, ‘성령의 부으심(the pouring out of the Holy Ghost)’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5).”

‘행위’와 ‘율법’ 역시 상호 의존돼 있다. 사람이 ‘행위’에 의지할 때 ‘율법’이 그를 향해 발동되어 그의 죄를 노출시키고(롬 3:20), 그를 ‘율법’의 저주 아래 둔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는 사람은 모두 저주 아래 있다. 그것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갈 3:10, 현대인의 성경).”

‘율법 의존’이 ‘성령’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율법 의존’이 ‘정죄(사망)’를 불러와 ‘생명의 성령(롬 8:2)’이 간여 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 의존이 성령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말은 ‘행위 의존이 성령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이는 ‘율법’이 의존돼 있는 ‘행위’를 의지할 때 ‘율법’이 정죄(사망)를 불러와 ‘생명의 성령(롬 8:2)’이 간여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과 ‘성령’은 모두 ‘복음(롬 10:17 下)’에 의존한다. 이는 복음 없인 그것들이 역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셋은 언제나 함께 공존(共存)· 동역(同役)하며 하나의 완전체를 이룬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복음’이 말해지는 곳에 ‘성령의 증거(요 5:32)’가 따르며, 그 결과 듣는 자에게 ‘믿음(롬 10:17 上)’을 발생시킨다.

‘믿음’을 일으키려면 ‘복음과 성령’이 함께 동역(同役)해 주어야 하고,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려면 ‘믿음과 성령’이 동역해 주어야 하고, 성령을 일으키려면 ‘복음과 믿음’이 동역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셋이 동역’할 때, 죄인에게 ‘하나님으로부터의 거듭남’을 발생시킨다(롬 1:2, 고전 4:15, 벧전 1:23).

이는 성경이 ‘거듭남’을 왜 ‘말씀으로 낳다(약 1:18, 벧전 1:23)’,‘성령으로 태어나다(요 3:5)’‘믿음으로 태어나다(요 1:12-13)’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는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믿음을 선물(엡 2:8)’,‘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서 난 믿음(고전 2:5)’이라 함도 그것이 ‘성령·복음’과 함께 엮어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