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민족적 우월감과 자존감 근거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진리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전하는 복음 진리 계시성과 독립성 강조한 바울

사도 바울
▲영화 속 사도 바울.
2021년 새해를 맞아, 브니엘신학교 총장 최덕성 박사님이 지난 2015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교회사 속 주요 인물들을 조명한 작품 <위대한 이단자들> 속 주요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기독교 관점에서의 이단이 아니라, 이단으로 몰리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지켜낸 인물들을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당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단’으로 불렸듯 말입니다. -편집자 주

바울(Paul, 1-62/64)은 이단의 괴수(행 24:5)였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는 이단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본래 유대교 바리새학파 엘리트 신학도였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회심을 했다. 그 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기독교 교리를 확립했다.

바울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율법주의와 지성주의 신령파를 견제하면서, 기독교 정통 교리를 체계화했다.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자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이 기다리던 바로 그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 분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예수 구원의 복음진리 전파에 헌신했다.

그는 죽은 예수를 상품화한 종교철학자가 아니었다. 대속의 희생을 담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나무에 달려 죽은 구원자 예수’였다. 유대인들은 신명기(21:23) 기록에 따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이며,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바울은 이 개념을 뒤집어 엎었다. 인류의 구원자는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었다. 그렇다. 신명기, 이 법전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는 저주받아 나무에 달려 죽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분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다.

바울은 ‘나무에 달려 죽은 구원자 예수’라는 안티테제를 내세웠다. 예수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했다.

나무에 달려 처형당한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바로 그 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화목제물, 그리스도라고 역설했다(갈 3:1). 바울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의 핵심과 대립점을 명료하게 설명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유럽, 북미, 대양주 주류 기독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체계화한 복음을 ‘왕따’시켜 왔다. 그들은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한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종 기독교는 바울의 가르침에 충실한 정통 신앙인을 ‘근본주의자’라고 폄하한다. 바울의 정통 신학을 사실상 ‘이단’ 사상으로 여기며, 기독교가 아니라 ‘바울교’라고 비난한다.

바울이 예수를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아라고 억지 주장하여 예수가 창출한 생명(bios)문화 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했다고 본다.

기독교의 핵심은 ‘나무에 달려 죽은 구원자 예수’가 아니라 ‘원수 사랑과 윤리의 모범인 예수’이며, 예수 신앙은 자기의 욕망을 소멸시키고 타인을 위한 삶에서 자기를 재구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바울은 이단 판별이라는 혼란스러운 사안을 두고 고심하고 씨름하는 오늘날 신학자들을 향하여 ‘나무에 달려 죽은 구원자 예수’를 각인시킨다. 교회를 향하여 ‘앙꼬 없는 찐빵’ 같은 기독교가 되지 말라고 당부한다.

역사적 기독교가 고백한 정통신앙을 따라 예수 복음전파에 전심전력하는 전도자들을 향하여, 용기를 가지고 더욱 분발하라고 한다. 교회를 향하여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을 지향하는 신종 기독교의 독성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1. 자랑스러운 유대인

바울은 자기의 태생적 유산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자신이 히브리인,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자손, 베냐민 지파 족속, 바리새파 유대교인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졌다(고후 11:21-22).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며, 히브리인이었다. 양질의 감람유로 유명한 갈릴리 북부 지역에서 태어났다.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자랐으며, 율법에 비추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새롭게 등장하는 예수신앙 운동 박해에 열성적인 것도 동족 유대인에게 자랑할 만한 업적이었다(빌 3:4-5).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바울은 부모와 함께 터키 동남쪽 다소에 끌려갔다. 흩어진 유대인 이민자, 곧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바울이 자라고 청소년기를 보낸 제2의 고향 다소에는 흑염소들이 뛰놀고 마(麻)와 옥수수와 포도가 자라고 있었다.

바울은 회심 전 막노동에 대해 유한계급 속물적 인식을 과시한 적이 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막노동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이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노예가 되었고(고전 9:19), 남을 높이려고 자기를 낮추었다(고후 11:7)고 말했다.

바울은 평안한 가정환경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그가 받은 교육은 절대 다수의 유대인들이 누릴 수 없는 특혜였다. 고액의 교육비는 부모가 부담한 것 같다.

바울은 높은 수준의 비평적 사고 훈련을 받고 철학 지식을 쌓았다. 신약성경 바울서신들은 바울의 학문적 통찰력, 논리력, 비평력, 종합력, 창의력, 수사력, 문학적 소양, 언어능력, 역사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진지한 성찰, 설득력 있는 표현 방법을 담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바울이 받은 양질의 교육의 열매이다.

바울은 구약성경 그리스어 번역본에 익숙했다. 비범한 능력으로 그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며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바울의 서신들은 구약성경 본문을 90회 가량 인용한다.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이 언급하는 예수의 부활은 보통 유대인의 일상 대화에서 들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가 성경에 통달하고 회당 예배와 가정교육을 거쳐 부활을 믿는 돈독한 바리새파 신앙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민족적 우월감과 자존감의 근거로 삼았다. 모세의 가르침에 따라 금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스 철학과 스토아주의 영향 아래에 있는 ‘다소 대학교’의 대부분 학생들과 달리, 유대주의를 선호했다. 유대교 율법 613개 조항을 존중하고 철저히 지켰다.

바울은 정통파 유대인이 되려고 주후 15년경 예루살렘으로 갔다. 갓 청년기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먼 길을 걸어, 유월절 순례객의 일원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한 달 보름이 넘는 동안 길리기아 평야의 진흙투성이 길과 시리아 관문을 통과하고 또 산지를 거쳐 가이사라를 지나 예루살렘에 당도했다. 유월절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거주민들보다 3배나 많았다. 숙소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베다니나 벳바게 근처 마을에서 묵거나 감람산 언덕에 장막을 쳤을 것이다.

바울은 바리새파 대학자 가말리엘 1세의 가르침을 따랐다(행 22:3). “무지한 자는 결코 거룩해질 수 없다”는 바리새파 명제를 받아들이고, 성문화된 율법뿐 아니라 전통적 해석, 구전(口傳)되는 율법도 배웠다. 조상의 전통을 지키는데 열심이었다(갈 1:14).

동년배들 사이에서 유대교 신봉 선두주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인문학적 배경, 성경지식, 전투적인 어조, 도전정신, 경쟁심리 덕분에 성큼 바리새파 엘리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바리새파 핵심당원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들, 동기생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단체생활을 했다. 율법을 지키고, 엄격한 의식(儀式)을 따랐다.

결혼은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에게 의무사항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서는 바리새파 엘리트가 될 수 없었다. 바울의 결혼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바울은 홀로 지냈다(고전 7:8).

바울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예수와 만나거나 마주쳤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서신들은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만났어도,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수 있다.

주후 30년 4월 7일 금요일,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 일몰 때 죄수들의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었다. 버둥대는 동물들을 짊어지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 도살된 가축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로마 군인들은 죄인들을 호송했다. 바리새파 최고 엘리트가 사형당하는 죄수들을 보려고 구경꾼 대열에 덩달아 끼어들 리 없다. 바울은 엘리트 체면을 구기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만남은 추종자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었다. 제자들은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담대하게 예수가 약속된 구원자 곧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화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선포했다.

사도들의 복음 메시지는 단순했다.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가르쳤다(행 5:42). 많은 개종자들이 생겼다.

바울은 예수가 처형당한 뒤 ‘예수 신앙운동’ 무리들을 대면했다. 그는 비로소 예수에 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때까지 바울을 포함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관망했다. 예수의 메시아 운동이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가말리엘 1세는 만약 이들의 행동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면, 그들을 반대하는 행동이 자칫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행 5:38-39).

다마스커스, 기념교회
▲사도바울이 변화되었던 다마스커스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FIM 국제선교회 제공
바울은 예수 신앙운동에 관용적이지 않았다. 그는 율법이 장악하고 지배하는 세상에 살았다. 율법과 계명에 대한 순종이 구원을 보장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게 한다고 믿었다(빌 3:6).

예수 신앙운동에 따르면, 구원에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행위는 허사가 되고 만다.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자처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경악했다. 자기를 구원의 시금석(마 10:32-33)이라고 하는 말에 놀랐다.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 신앙의 공존, 유대교와 기독교의 상생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그러나 율법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양자택일이 불가피했다. 그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왕이 등장하여 자기 민족을 이방인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왕은 죄인들을 멸하고 이방인들을 몰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메시아가 이미 세상에 왔다는 주장은 율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 바리새파의 존립을 위협하는 이단사상이었다.

바울은 호기심 많은 바리새파 엘리트 신학도였다.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이단자 예수에 관하여 역사가 요세푸스가 알고 있는 지식 정도는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우리는 옳고 저들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을 핍박할 구실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계시만 주어지면, 즉각 율법을 완벽하게 포기하고 기독교 신학자가 될 수 있는 정신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바울은 행동하는 유대교 엘리트였다. 예수 신앙운동을 박해했다. 완전히 박멸하려고 했다(갈 1:13).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예수 신앙을 추종하는 남녀를 끌어내어 감옥에 보냈다(행 8:3). 눈에 띄는 대로 붙잡아 예루살렘에 끌고 갈 수 있는 권한도 받아냈다(행 9:1-2).

2. 회심 체험

초기 예수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이었다. 부활은 예수의 구원 사역을 보증하고, 그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징표였다.

기독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리새파 유대인들에게 구원자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는 속임수였으며 짜증스런 헛소문이었다.

의욕적인 학구파 바울은 예수 신앙인들을 박해하려고 다마스쿠스(다메섹)로 가고 있었다. 육중한 헐몬 산과 레바논 지역 협곡으로 흐르는 오아시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면 예수 신앙운동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 착오를 반성하면서, 그 운동을 중단시키고 추종자들을 박해하여 유대교로 귀정(歸正)시키려 달려가고 있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뜻밖에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수는 베드로,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명의 제자들, 열한 명의 제자들, 500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나타났으며, 바울에게도 나타났다(고전 15:5-8).

바울은 자신이 수치스럽게 여긴 신흥 이단 무리의 교주를 만났다. 사기꾼이라고 경멸하고 무시한 이단자, 부활한 예수를 직접 목도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그가 어떻게 예수를 알아보았을까? 소문으로 듣고 알고 있는 예수 이미지들이 종합되었을까? 예수는 바울에게 말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에다 발길질을 하다가는 너만 다칠 뿐이다(행 26:14).”

바울이 “당신은 누구인가?” 하고 묻자, 예수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 내가 나타난 것은 너를 내 일꾼으로 삼아 네가 오늘 나를 본 사실과 또 장차 너에게 보여줄 일들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하려는 것이다(행 26:16)”고 말했다.

예수는 바울의 심혼을 사로잡았다. 불가항력적 힘이 바울의 인식 방법과 가치 체계를 완전히 바꾸었다.

하나님의 은총과 특별 계시로 바울이 알게 된 진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①예수 그분은 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구원 사역을 담당한 구원자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그 그리스도다. ②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율법 시대는 끝났다.

③누구든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면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를 용서받는다. ④율법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⑤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민족 공동체를 넘어서는 전 인류의 구원자다.

바울을 굴복시킨 것은 지식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180도 변화가 하나님의 택정과 은혜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준비시키고 회심시키고 이방인 전도자 사명을 부여했다. 주권자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하고 택하고 부르셨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은총으로 택했다.

당신의 아들의 복음을 이방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자신에게 나타내 주셨다고 했다(갈 1:15-16). 바울은 그리스도의 특별 계시가 자신에게 주어지고 또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을 확신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드셨다(빌 3:12)”고 했다.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에 아라비아로 알려진 나바테아 영토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많은 고초를 당하고 위축되어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

다마스쿠스는 그리스 문화권이며,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상업 요충지였다. 이방인 상인들이 고정적 상업기지를 갖고 있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에서 3년 동안 복음전도에 힘썼다(행 18:5). 많은 이방인들이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아테네, 고린도, 로마 등지에서 전한 복음의 요지는 간단하다. “메시아는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는 바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입니다(행 17:3)”였다.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입니다(행 18:5)”라는 이 요지는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과 같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과 이 집 저 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행 5:42).

칭의론 새 관점
▲최덕성 박사. ⓒ크투 DB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진리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누구에게서 전해 들었을까? 타인에게 배웠을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었다.

“형제들이여,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둡니다.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갈 1:12).”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진리의 계시성과 독립성을 강조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안디옥에 있는 예수 신앙 공동체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부활한 주님을 만난 뒤 떠오른 생각들을 다시 정돈하면서, 복음의 핵심을 정리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을 때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안디옥의 기독인들에게서 얻은 단편적인 정보들이 바울의 정신적 여과기를 통과하면서 완벽하게 걸러지고 정확하게 종합되었다.

하나님은 바울의 비평적 사고능력과 통찰력을 사용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고 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실에 놀랐던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전할 때 “인간이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으로 합니다(고전 2:13)”고 말했다. <계속>

최덕성 지음,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1장 1부.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