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러뱅
▲물음표와 느낌표가 합쳐진 인테러뱅(interrobang).

본문: 누가복음 10장 17-20절

인터러뱅

물음표(?)와 느낌표(!)가 하나로 합쳐진 모양의 부호를 인터러뱅이라고 합니다. 인터러뱅은 1962년 미국 광고대행사 사장인 마틴 스펙터(Martin K. Specter)가 만든 새로운 개념의 문장부호입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는 인터러뱅을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물음느낌표, ‘의구심’과 ‘놀라움’이 공존하는 대단히 역설적인 부호.” 곧 인터러뱅은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움’을 나타내는 상상초월의 감탄사이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생각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생각의 빅뱅입니다.

인터러뱅 속에는 놀라운 창조의 법칙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든 물음표(?)를 던지라는 것입니다. 둘째, 물음표를 해결하는 느낌표(!)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인터러뱅’의 창조의 법칙으로 탄생한 한 도서관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도서관하면 으레 떠올리는 단어는 ‘정숙’입니다. 반면에 ‘대화’라는 단어는 도서관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런던의 한 도서관은 다릅니다. 이곳에서는 두런두런 대화의 소리가 커피 향처럼 가득합니다. 이곳은 ‘사람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빌려주듯 사람을 빌려주는 도서관, 바로 ‘리빙 라이브러리’입니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인 로니 에버겔이 창안, 유럽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상시적 도서관이 아닌 이벤트성 도서관입니다.

대구에도 8년 전부터 ‘리빙 라이브러리’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 도서관에서 사람 책을 읽는 방법은 일반 책을 고를 때와 같습니다. 도서목록을 보듯 사람목록을 보고, 원하는 사람을 대출하면 됩니다. 단, 한 사람당 한 명만 대출이 가능하며, 대출 시간은 30분입니다.

사람 책의 목록은 다양합니다. 18세 싱글맘이 된 소녀, 60세에 집을 나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할머니, 여자 소방관, 완벽한 채식주의자…. 대부분 우리가 대화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편견 속에서 바라봤던 사람들입니다.

사람 책을 읽는 것이 일반 책을 읽는 것과 다른 점은 바로 질문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질문과 답이 오가는 와중에 대화가 싹트고 편견은 녹아내리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꽉 막혀가는 우리 시대의 소통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진 로니 에버겔이 ‘사람 책 도서관’ 느낌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리빙 라이브러리’는 인터러뱅입니다.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왜 죽는가? 죽으면 끝인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 죽음의 대한 질문을 심각하게 던지고 고민한 사람은 십자가라는 느낌표로 이 문제를 해결받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인터러뱅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죽음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인간이 죽게 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죄를 지어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했다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내가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는 ‘대형대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셔서 십자가에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참혹한 십자가에 달릴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십자가에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우리를 자리바꿈하셨습니다. 우리가 달려죽어야 하는 그 십자가에 주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대속의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 됐습니다.

구원은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다

미국 기독교 역사상 60년 최장기 베스트셀러인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을 쓴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순종하기 때문에 우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이유는 오직 희생제물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이다. 결코 각 개인의 거룩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핏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구원은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너무 너무 값비싼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다고 하니까, 그 길이 너무 쉽다고 값싼 은혜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쉬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너무나 값비싼 대가 지불을 하셨습니다.

값싼 은혜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독일의 설교가요 신학자였던 본회퍼 목사님은 히틀러의 독재 정권 앞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몸소 보여준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16세 때 이미 신학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깊은 사고력과 성찰력까지 겸비해, 20세 때 이미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본회퍼는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단에서, 교회에서, 방송에서 쉼 없이 외치며 선포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히틀러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연금되며, 감옥에 까지 갇히는 고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1945년 4월 9일 39살의 나이로 감옥에서 순교당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당시 독일 교회가 연약해진 원인과 독일 교회가 사회를 향한 영향력을 상실한 원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 교회가 값싼 은혜 개념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본회퍼 목사님은 ‘값싼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회개 없는 용서, 십자가 없는 은혜, 희생 없는 제자도,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는 성도들, 생활이 없는 신앙,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이다.”

혹시 우리도 값비싼 구원의 은혜를 받고서, 값싼 은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회개 없는 용서를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 없는 은혜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희생이 없는 제자도를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축복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활이 없는, 삶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라

예수님께서는 늘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무리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들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한 번은 자신을 따르는 70명의 제자들을 둘씩둘씩 짝을 지어 동네와 각 지역으로 보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날로 말하자면 노방전도 실습을 시켰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도와주기만 했던 제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에 대해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염려와는 달리 제자들은 노방전도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노방전도 하다가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했더니 귀신들이 항복을 하고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위해 기도했더니 병든 자 가운데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이런 능력은 예수님만 행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이런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너무나 기뻐서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너무 흥분하지 마라.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이미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눅 10:18-19).”

예수님은 여기까지에서 말씀을 마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한 것 때문이 아니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곧 너희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 것으로 인해 진정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입니까? 뱀과 전갈에게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수 있는 권세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어떤 능력을 받아서가 아니라 어떤 축복을 받아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이유 하나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이 가장 값비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젊은이들도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뉴스에 보도되는 이야기들을 보면 좋은 이야기는 없고 힘들다는 이야기, 안 좋은 사건 사고에 대한 이야기들 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경제와 정치를 보고, 뉴스를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은 소망이 없는 것 같고 웃을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이후 더 심해졌습니다. 최근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웃고 기뻐하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너무 감사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십니까? 기뻐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기뻐하셨고 감사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감사하셨습니까?

세상을 보면, 때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보면 웃을 일도 기뻐할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터러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값비싼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날마다 생각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 희생양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

레위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5대 제사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은 십자가를 연상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짐승을 끌고 오면 해야 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짐승이 흠이 있는 지 없는지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확인을 받고 난 다음에 짐승을 데리고 온 사람은 자신의 손을 짐승의 머리위에 얻고 꾹 눌러서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안수기도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는 죄를 지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죽을 수 없으니,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켜서 자기 대신 짐승을 죽게 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안수를 다 하고 난 다음이 짐승을 가지고 온 사람이 직접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에 피를 뿌리고 번제단에 짐승을 불사라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제사장이 했습니다.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성막 연구에 최고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강 목사님이 초창기 성막세미나를 하시면서, 여건이 좋지 않아 어떤 공원에서 400명의 목회자를 모시고 직접 성막에서 번제를 드리는 장면을 역할극을 통해 하게 되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하는 안수를 하고 양의 목에 칼을 꽂는 순간 양의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그 양의 비명소리 앞에 다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이 생각이 나서 울음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값비싼 구원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구나. 이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날마다 기뻐하며 감사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라

아직까지 구원의 값비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이 구원의 은혜가 믿어지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이 사건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결국 지옥의 형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예수님 믿는 것처럼 교회에 다니다가 구원받을 믿음이 없어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묵상하며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운 일과 상황을 만날 때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묵상하십시오.

그 십자가에 주님이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달려죽어야 하는데 지금 내가 살아있고 구원받았음을 묵상하십시오. 어느덧 기쁨과 감사가 내속에서 올라 올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너무나 많이 들어서 우리의 심령이 무디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결코 무디어져선 안 되는 이야기가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의 삶을 살라

그런데 우리가 값비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 기뻐하고 감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제 구원받은 백성으로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불의 전차
▲영화 <불의 전차> 중 한 장면.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기 위해, 예수님 닮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의 생명의 은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투데이(매일)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불의 전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81년 제작된 영화입니다. ‘불의 전차’는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의 감동 실화로, 오직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달렸던 선교사 에릭 리델의 감동적 이야기입니다.

에릭 리델은 1924년 올림픽 100m 달리기 종목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이런 그가 예선 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이유로 100m 달리기를 포기합니다. 영국의 황태자까지 설득을 했지만, 주일날은 달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출전을 포기합니다. 리델은 영국 국민들에게 ‘배신자’니 ‘옹졸한 신앙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리델은 다른 날 열리는 400m 경기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고, 400m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워 우승함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에릭 리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 200m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달렸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힘껏 달렸습니다.”

그 영화에서 제가 제일 감동받은 장면은 마지막 400m 달리기를 앞두고 있는 리델에게 미국의 100m 달리기 선수인 숄츠가 와서 쪽지를 하나 리델에게 전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사무엘상 2장 30절이 적혀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제가 추측해 보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숄츠는 100m 달리기를 포기한 에릭 리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숄츠는 그 에릭 리델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숄츠는 리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리델, 당신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신을 존중히 여길 것입니다. 당신이 이 경기에서 우승할 것입니다.” 리델은 그 쪽지를 손에 들고 뛰었고, 세계신기록을 세워 금메달을 획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 경홀히 여기는 자를 경홀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을 값비싼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 구원이 값비싼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에릭 리델처럼 존중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감사인생’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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