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 채플 의자 교회 자리 예배 목사 마이크 집회
▲한 교회 예배당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언 16:3)”.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잠언 16:11)”.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잠언 16:13)”.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언 16:28)”.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32)”.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 하니라(잠언 18:5)”.

백과사전에서 ‘개혁(改革)’의 본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改)’는 자기 자신(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려 고치는 것이고, ‘혁(革)’은 가죽을 고치다는 뜻입니다. 고대에 가죽은 곧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의 계급과 신분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죽옷을 바꾸면 다른 계급과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개혁은 급진적이거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닌, 사회의 특정한 면의 점층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의 사회운동의 하나입니다. 개혁운동은 혁명과 같은 더 급진적인 사회 운동과는 구별됩니다.

특히 위에 언급한 잠언 16장 말씀은 크게 국가의 대사로부터 작게는 일대일의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을 계획하고 도모할 때, 필히 명심해야 할 주옥같은 지침들로 가득합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핵심적인 지침은 바로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은 카톨릭의 사제였으며 독일의 비텐베르크 신학교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이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후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게 됩니다.

이 95개 조항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로마가톨릭이 자행하고 있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고발한 것입니다. 1515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면서 부족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고 그것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리 교계에서도 항존직 선출 과정에서 부족한 교회 재정을 채우기 위해 직분마다 액수를 정해 일정한 금액을 거둬들이는 교회들도 있는 실정입니다.

면죄부란 자신이 지은 죗값을 면죄부를 사서 사함 받는 것입니다. 당시 교황은 그리스도 권세를 위임받은 자로 여겼기에, 인간의 죄를 사면할 수 있다는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면죄부를 돈으로 사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연옥에도 가지 않고, 심지어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대신 사면, 그도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교황 이름으로 발행된 면죄부를 사서 죄 사함을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신학교에서 로마서를 가르치던 중, 인간의 모든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속죄 받을 수 있다는 너무나 정확하고도 확신 있는 말씀을 접했습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의 잘못된 신앙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썼던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지만, 루터는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실로 끔직한 행동을 결행한 것입니다. 사제직 박탈, 교수직 박탈, 사회에서의 매장,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올바른 길이고 신앙 양심으로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을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의 용기에 의해 종교개혁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루터는 자신이 종교개혁을 목적으로 한 일은 아니었고 단지 로마 교황의 잘못을 고치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이것이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하고 개신교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마르틴 루터와 같은 용기 있는 믿음의 지도자나 인물이 작금의 시대에도 간절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고 서로 높은 탑을 쌓겠다고 경쟁하며,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수십억, 수백억원의 돈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어느 교회 목회자는 돈이 없어 어둡고 캄캄한 지하 월세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둘 다 같은 하늘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는 사회적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개척교회 목사들은 목회자들 세계에서마저 무능하고 별볼 일 없는 목사로 취급받는 시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교회의 현실과 또 개선해 나가야 할 점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짚어야 합니다. 교회 목사와 장로,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은 앞으로 교회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방법대로 나아가기 위해 뼈를 깎는 개혁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깊은 회개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세례 요한, 사무엘, 요나, 나단 같은 설교자가 없다는 현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목사님들께서는 최소한 주일 전날인 토요일만은 설교 준비에 혼신을 다해야 하지만, 결혼식 주례를 두 곳이나 예약받아 참석합니다. 그러면 하루가 다 가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결혼식 축하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주례비에만 신경을 쓰며, 주일 설교는 허겁지겁 유명 목회자들의 것을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짜깁기하기 바쁩니다. 매달 얼마를 주면 매 주일 보내오는 설교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회자들도 있으니, 그들이 진정한 목회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나 싶습니다. 시대를 원망해야 하는 것인지,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목회자들의 자질이 부족한 것인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개혁은 힘 있는 권력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라 안을 보십시오. 코로나 시국에 국민들은 신음하는데 1년 내내 ‘검찰 개혁’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고 있으니, 진절머리가 날 지경입니다.

개혁은 본인 자신이 먼저 솔선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는 자신들을 개혁하지 않으면서, 하부 조직이나 아랫사람에게만 개혁하라고 한다면, 진정한 개혁이 되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위시한 청와대 권력자들과 각 부처, 그리고 이 나라에 속한 모든 국가 기관과 종교 기관들이 자기 반성과 뼈를 깎는 성찰을 하지 않고서는 개혁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오롯이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로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개혁을 하려면 먼저 개혁의 목적을 당당히 발표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서로 소통하면서, 함께하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한 뒤에 시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하려는 자신이 먼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실과 정직, 정의와 공의로움으로 모든 일을 수행하고, 특히 교만과 탐심을 버리지 않으면 개혁이란 물거품이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개혁 대상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행복하고 안전할 수 있다면 비로소 개혁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라에서 실시하는 개혁은 어떻습니까? 오롯이 상대를 적폐로 몰아세우고, 온갖 거짓술수로 범죄를 가리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싶어 참으로 한심하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분들은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바르게 직언을 해야 할텐데, 아부와 아첨으로 물들다 보니 나라 전체가 무방비 상태입니다. 도덕성과 능력 없이 큰 소리만 치는 권력자들에 의해 나라가 작동되고 있으니, 이러다 나라가 얼마 못가 완전히 망가질까 개탄스럽습니다.

심지어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대통령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원도 있습니다. 얼마나 구린내가 나면 그런 말까지 나올까요?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라를 위해 열심히 뛰시는 지도자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의 수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이나 잡고 누리려 선량한 성도들을 사지로 내모는 목사님과 장로님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어서 회개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로 변화되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특히 노회와 총회에 간곡히 바랍니다. 총회와 노회법은 성도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지도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더 가까이 하려 노력하는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을 지켜내는 올바른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목사와 장로들을 위한 법만 있습니다. 오히려 힘 없는 성도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교회에서 법에 의해 쫓겨납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 놓고, 온갖 거짓말과 음모로 서로 야합하여 교회에 대한 바른 말을 건의하는 성도들을 면직과 출교로 내치는 법이 진정한 하나님을 위한 법일까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법정에서는 뭐라고 변명하시겠습니까?

오래 전에 제정한 시대에 맞지 않은 총회 헌법 역시 개혁 대상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법을 만들고 수정하는 권한조차 목사님과 장로님들에게만 있으니, 이 또한 개혁해야 할 난제가 아닐까요?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