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의의 뿌리 사랑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의(義)는 생명이고 전부이다. 의로 구원받으며 영생, 양자됨, 상속 등이 다 의(義)로부터 따라 나온다. 기독교 신앙을 ‘이신칭의’ 신앙이라 함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의에서 이 모든 것이 따라 나오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원천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방편일 뿐이다. ‘사랑’이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의 원(元) 근원이며 궁극이다. 성경이 항상 사랑을 모든 것의 앞에 두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주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은 의로우시며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NIV, 시 145:17).”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칭의’ 역시 ‘의’를 ‘사랑’으로 만든다. 일부 ‘이신칭의’ 신봉자들 중에는 칭의의 뿌리를 ‘믿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뿌리다. ‘믿음’은 근원(近原)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원원(遠原)’이다.

우리는 불의하고 형편없는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다. 우리는 나의 구원을 위해 ‘의’와 ‘믿음’을 신뢰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궁극적인 신뢰를 드린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날 구원했다’고 더 많이 고백한다. 그의 사랑이 없다면 ‘믿음’도, ‘의(義)’도 사변적인 교리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사랑’이 그 모든 것들을 의미 있게 한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새번역, 엡 1:4)”.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입혀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자격 없는 죄인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이 순서를 변개시켜선 안 된다.

‘구원의 서정(order Salvation)’에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 곧 ‘하나님의 사랑’을 맨 앞에 존치시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사랑하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 4:16)’는 ‘기독교의 대헌장(the Great Charter)’은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시며 그가 행하시는 제일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 사랑이 택자를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려 의(義)이신 독생자 그리스도를 내어주게 했고, 성령을 주어 그를 믿게 했다.

◈그리스도, 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의(義)’보다 앞서지만, 그렇다고 둘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이 언제나 함께 있다. 모두에 언급했듯, ‘하나님의 사랑’은 ‘의의 사랑’이다. 의를 제쳐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논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義)’가 분리될 수 없듯, ‘그리스도’와 ‘의(義)’ 역시 분리할 수 없다. 이는 그 ‘의’가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롬 5:18)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이기(갈 2:17)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의, 그리스도’는 함께 어우러져 있다. 성경도 셋을 함께 엮어 놓았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한 ‘믿음’ 역시 ‘그리스도 안(골 1:4. 딤전 1:14, 딤후 1:13)’에 있다. 이는 믿음이 그것의 뿌리인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요 3:16, 롬 3:22). ‘그리스도 밖의 믿음’이란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누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음을 논해도, 그리스도가 간과된 믿음은 유대교적 단일신 신앙(monarchianism)에 불과하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삼위일체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 형태를 취한다(고전 12:3. 갈 5:5).

종합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정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벧전 1:21)”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하신 것도 ‘나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하나님을 믿으라’,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요 8:56), 다윗(행 2:25, 34-35), 선지자(벧전 1:10-11), 사도들이(요 5:24; 17:3) 가졌던 신앙이고, 우리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여’하시는 은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고(롬 3:24; 5:1, 히 13:21),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롬 7:25, 고후 1:20).

◈조건 없는 사랑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의 기쁘신 뜻과 사랑에 의해서이다(엡 1:4-5). 곧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심판 아래 있는 인류 중 얼마(a part of mankind)를 사랑하여 구원해 내시기로 하셨다.

그 외에 인간 편에서의 어떤 ‘조건 충족’, 예컨대 인간의 ‘선함’이나 ‘열심’을 전제하지 않았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어떤 유기된 ‘불택자’가 지금보다 백배 의롭게 된다 해도, 그것이 그로 하나님의 구원 택정을 받게 하지 못한다. 반대로 ‘택자’가 지금보다 백배 악해도 그것이 그로 하나님의 구원 택정에서 탈락되게 하지 못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4-5).”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인간 구원을 결정짓는 요소이다. 이는 ‘그들이 선악을 행할 줄 알기 전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말씀에서도 재확인된다(롬 9:11-13).

이런 우리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알미니안(alminian)의 ‘예지예정(foreknowledge predestination)’ 교리가 있다. ‘하나님이 장차 그 사람이 예수 믿을 것(의롭게 될 조건으로서의)을 내다보시고 그를 구원 예정하셨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구원 예정’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물’이 아닌 ‘그것의 조건’이다.

하나님은 그가 믿을 것을 아시고 누군가를 구원 택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들을 사랑하사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그 결과 구원의 통로인 ‘의와 믿음’을 그들에게 주신다(행 13:48, 엡 2:8).

‘구원에의 부름’을 받은 후에도 이 ‘원리’는 불변이다. 아무 의(義)가 없는 그들에게 사랑으로 ‘그의 의(義)’를 입혀 주셨듯, 구원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신다. 그들에게 ‘행위적 의’와 ‘열심’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그들에 대한 사랑이 중단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찬 411장)’라는 찬송 가사처럼, 그들의 연약함을 볼수록 하나님은 더욱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식보다 병든 자식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처럼.

이는 아브라함, 야곱, 다윗, 베드로를 위시해 수많은 성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셨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흠결이 많았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다함없는 용서로(마 18:22) 끝까지 그들을 품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불완전함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딤후 3:16)” 하며, 그들의 온전함을 도모하신다(롬 8:29, 빌 1:6). 물론 그 온전함은 이 땅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성화의 큰 진보를 이루어 지금보다 백 배 더 온전해진다 해도,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더 커지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을 주신 그의 사랑은 그들에 대한 충분하고도 완전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더 줄 사랑이 남아있지 않다.

당신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못다 받은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기다리는가? 꿈 깨시라.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