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아담의 죄’는 개인 한 사람만의 죄가 아닌 전 인류를 모두 죄에 빠뜨린 대죄이다. 이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 범죄했기 때문이다. 죄가 없던 세상에 그 한 사람의 범과(犯科)로 세상에 죄를 들여와 모든 사람을 타락시켰다(롬 5:12).

그리고 인류의 ‘아담의 죄의 참여’는 다만 소극적 의미에서의 그것이 아니다. 예컨대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는 인류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단지 인류 대표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부득불 아담의 죄에 참여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담이 범죄한 그 때 그의 후손 모두가 시공간을 초월해 그 현장에 함께 있었고, 그의 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는 어느 누구라도 그 때 태초의 유혹의 현장에 있었다면 예외 없이 아담처럼 범과하게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義)’ 역시 단지 소극적으로 그의 의(義)를 전가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해; 롬 6:6, 갈 2:20), 마치 그 자신이 죄값을 지불한 것처럼 간주 받아 의인(義人)이 된다는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전가 받은 의’하며, 곧 ‘동정받은 의’정도로만 간주하여 그것의 수납에 당당함이 결여돼 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이룬 ‘나의 의(義)’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것을 취할 때, 마땅히 내 것을 취하듯 ‘당당하게(엡 3:12)’수납해야 한다. 담대함(히 4:16)을 뛰어넘어 뻔뻔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으로이다. 이것이 그에게 의를 전가해준 그리스도에 대한 예의이다.

당당함 없이, 주저주저한 태도로 그것을 수납하는 것은 겸손도 겸양도 아닌 불신앙이고, 오히려 그것은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욕되게 한다.

◈대행(代行) 대속(代義)의 필요

무흠했던 아담이 그의 범죄로 흠결을 갖게 된 후, 더 이상 그와 그 후손이 하나님께 자신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의(義) 곧,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적 의’와 ‘죄 값으로서의 구속적 의(사망)’를 드릴 수가 없게 됐다.

이는 ‘타락 전’ 그들이 요구받은 의가 ‘무흠한 인간의 의’이었듯, ‘타락 후’ 요구받은 ‘죄삯 사망’ 역시 ‘무흠한 인간의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범죄 후, 그들은 이 둘의 요구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됐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대행(代行)·대속(代贖)의 의(義)’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작금에 그리스도의 ‘대행·대속’이 온라인상에서 ‘능·피동(能被動) 순종’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능동(能動) 순종’을 주장하는 이들 중엔(물론 그들은 ‘피동 순종’도 함께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자기의 구원을 위한 의로움을 획득했고, 그 획득한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여 주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가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된 후에라야 비로소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인상을 풍겨낸다. 성경엔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구절이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이다. 이들의 해석대로라면, 먼저 그리스도가 거룩케 된 후 믿는 자들을 거룩케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는 본래 거룩하지 않았던 그리스도가 자신의 율법적 순종을 통해 거룩케 된 후 비로소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자 하나님은 본래부터 거룩하시다(눅 1:35, 요 10:36).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여기서 ‘거룩’은 ‘구속’과 동의어로 씌었다(출 29:37, 레 10:17, 고전 1:30, 딛 2:14).

그리고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함이니이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룬 복음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한다(요 17:17)’는 뜻이다.

반면 ‘피동(被動) 순종’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예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의 의미를 축소하여, ‘칭의’엔 그리스도의 ‘구속적 의’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를 그들이 주장하는 ‘피동적 순종’의 근거로만 삼는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9절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능·피동(能被動) 순종’을 다 함의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은 그리스도의 ‘능·피동(能被動) 순종’을 다 인정했다. ‘능동 순종’의 근거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를, ‘피동 순종’의 근거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를 제시했다.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의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우리에게 전가되어진 그리스도의 의는 무엇인가’ 중에서)

◈타락 후 율법을 주신 이유

고금을 막론하고, ‘율법’의 용도를 범죄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지켜 구원받게 하려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성경이 명시적·묵시적으로 가르치듯, ‘율법의 의’는 타락한 죄인들에게가 아닌 무죄했던 아담에게 요구했던 의(義)이다. 이는 그것은 죄인이 지킬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것이기 때문이다(십계명은 ‘행위적·내면적’ 준수를 함의한다).

그럼 율법이 무흠했던 아담을 위한 것이었다면, ‘아담의 범죄 전 에덴동산에서 주어졌어야지 왜 타락 후 죄인들에게 주어졌을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는 타락 전에는 율법 없이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있었지만, 죄로 무지해진 후에는 율법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죄인에게 있어 율법의 기능은 오직 한 가지,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도록 하기(롬 3:20, 갈 3:24) 위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락 후 율법이 주어졌다’는 사실에만 착안해 그것의 목적이 ‘죄인이 그것을 지켜 구원 얻도록 하려는 것’으로 오해했다. ‘죄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것’은 ‘죽은 자가 살겠다고 용쓰는 것’과 같다.

죄로 죽은 자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를 뿐더러 구원받겠다는 의지도 없다. 죄로 죽은 자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것은 자기가 죽었음을 망각한 처사요, 자기의 시체에 분(粉)으로 화장(化粧)하는 것처럼 위선이다.

예수님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외식자요 회칠한 무덤’이라 한 것도(마 23:27)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죄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들의 ‘의(義)’를 위해 대행(代行)·대속(代贖)해 주는 길 밖에 없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가 사람 되어 오셨다. 그러나 그 의(義)는 다만 ‘무죄한 아담의 상태’로의 회귀가 아니다.

타락 전의 아담의 상태가 비록 무흠하기 했으나 다신 실패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기껏 우리에게 ‘무죄한 아담의 의’정도를 입히기 위해 사람 되어 오시지 않았다.

다신 실패할 수 없는 ‘아담보다 나은 의’, 곧 영원한 ‘하나님의 의(롬 3:21)’를 전가해 주시려고 그의 고귀한 목숨을 희생시키셨다.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택자에게 주시려고 했던 ‘의’도,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가르치신 ‘의’도 그리스도의 대행(代行)·대속(代贖)으로 말미암는 이 ‘하나님의 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를 오직 ‘믿음’으로 취하게 하셨다(행 13:39). 그리스도인의 의를 ‘하나님의 의’, ‘믿음의 의’라 한 것도 이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취하게’ 하신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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