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애타게 부르짖어야 할 것
본문: 역대상 4:9-10

분당우리교회 송구영신예배 2021
▲이찬수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유튜브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9-10)”.

연말이 되면 교수님들이 올 한 해를 총정리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합니다. 올해는 ‘아시타비(我是他非)’라는 사자성어가 선정됐습니다. 이 단어는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 이런 뜻이라고 합니다. 올 한 해 세태를 이 한 단어로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교수님들이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매 연말마다 그 해를 특징짓는 사자성어가 발표되는데, 이것들을 죽 정리해 놓은 내용을 보다가 굉장히 흥미로운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매 연말마다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 2001년도라고 합니다. 첫 해에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 뽑혔습니다. 그 해에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2002년에는 이합집산(離合集散), 2003년에는 우왕좌왕(右往左往), 2004년 당동벌이(黨同伐異) 등 매년 발표됐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2001년부터 2020년까지 사자성어 발표된 것을 보니, 대부분이 부정적인 단어였습니다. 희망적이고 올 한 해는 꿈에 부푼 해였다 하는 사자성어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매년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위로가 됐습니다. 올해는 연초부터 코로나19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혼란과 혼돈, 계획의 차질로 너무 너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처럼, 그 해마다 채워야 할 아픔과 혼란과 혼돈이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없었다 해도, 또 다른 무언가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때문에 한 해를 총결산하고 되돌아보며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새해에는 아무런 어려움과 혼란이 없고 순탄한 새해가 되길 원한다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기도가 있습니다. 내년에는 또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생각지 못한 혼란으로 우리 마음이 어지러울지 모르지만, 은혜 주셔서 잘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님 은혜가 넘치는 한 해가 되길 원한다는 기도가 드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송구영신예배에 소개해 주고 싶은 인물을 한 명 선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야베스입니다. 우선 본문에 나오는 야베스에 대해 살펴보면, 이 분이 가진 너무 귀한 모습이 두 가지 있습니다.

1. 결핍과 고통을 방치하지 않는 삶의 태도
2.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극복하려는 삶의 태도

첫째로 그는 자기 삶에 드리워져 있는 고통의 문제, 결핍의 문제를 방치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 드리워진 고통과 결핍의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극복하려 몸부림치는 것도 귀하지만, 자기 힘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극복하려 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야베스를 너무 존경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태도를 얼마나 귀하게 보셨는지, 지금 우리가 본문으로 삼는 역대상에만 해도 대략 5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4장에만 40여명이 열거돼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이름만 열거돼 있는데, 유독 야베스에 대해서는 두 절에 걸쳐 그에 대해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 야베스의 삶은 함께 나누고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의미가 부여됐기에 인생을 설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 땅에서 화려하게 잘 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야베스 같은 인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부하게 살고 멋지게 잘 살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았느냐? 이건 후대에 나누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입니다.

지난 한 해 코로나19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내 아들, 내 딸, 김 집사, 박 권사의 이름은 기록에 남겨야 돼’ 이런 삶을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야베스라는 인물은 결핍과 고통으로 시작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대상 4:9)”.

야베스 이름과 관련해 독특한 게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어머니가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보통 아버지가 이름을 짓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 없이 어머니만 나옵니다. 학자들이 여러 추측을 하는데, 어머니가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름의 의미도 독특합니다. 새번역으로 보면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우울한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야베스는 태어나면서부터 결핍과 고통의 문제를 갖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귀함은 그의 삶이 결핍과 고통으로 출발한 가슴 아픈 인생이었지만, 그런 연약함을 극복하려 안간힘을 썼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무엇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까? 본문 9절에서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으로 보면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야베스는 그 인생의 출발이 힘들었지만, 이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 몸부림쳤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참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야베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귀한 모습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불쌍한 사람은 아무 약도 가진 것이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희망 뿐이다.” 이 명언을 근래 발견하고 정말 공감했습니다.

20대 초반에 저도 너무 힘들고 어려운 긴 터널을 지났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 제게 있는 것이라고는 희망 뿐이었습니다. 이것마저 내려놓으면 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어려운 터널을 지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희망입니다. 야베스에게서 배울 것이 이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에 쓰인 문구를 다들 아실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너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을 며칠 묵상하면서, 정말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면 지옥이 아님을 생각했습니다.

최근 읽은 책 <아비투스> 한 대목인데, 심리학 용어 중 ‘크랩 멘탈리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어부들이 꽃게를 산 채로 잡습니다. 그물망에 끌려 올라오는데, 어부들은 작은 바구니에 툭툭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꽃게들은 그 정도 바구니는 얼마든지 기어서 탈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 어부들은 안심하고 그 낮은 바구니에 집어넣습니까? 꽃게들은 탈출하려는 동료를 끌어내리기에 바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을 생각하니 너무 슬펐습니다. 그곳의 꽃게들은 모두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서로 도와주고 협력해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앞선 게를 끌어내리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당신은 여기서 선택할 수 있다.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고 다른 꽃게를 방해만 할 것인가? 조금 오르다 쉽게 좌절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기어올라 결국 바구니를 탈출할 것인지를 선택하라.”

올 한 해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그저 끌어내리기 바쁜, 이 ‘크랩 멘탈리티 효과’에 빠져 계신 분이 없습니까?

지금 이 사회를 규정짓는 한 마디는 ‘분열’입니다. 끊임없이 끌어내립니다. 이것이 ‘크랩 멘탈리티 효과’입니다.

오늘 성령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끌어내리기에 혈안이 된 인생이 아니라, 서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서 ‘크랩 멘탈리티 효과’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앞서 고통으로 점철된 야베스였지만, 나는 함몰되고 무너지지 않겠다는 모습이 야베스의 참 귀한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 귀한 모습이 있는데,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극복하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지금 반복해서 굵은 글씨로 표현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의 중심이 이 어려운 결핍의 문제,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내가 애써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주님, 내게 복을 주시길 원합니다.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저는 자신의 결핍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야베스를 보면서 종종 흥얼거려지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 여기 계시기에 저 거친 파도가 반석이 되고…’.

‘코로나19 때문에 못 살겠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다, 부부 간에 불화가 많이 생겼다, 자녀와 대화가 잘 안 된다’ 이런 분석이 나왔으면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주님 여기 계시기에’.

하지만 우리 대부분의 태도는 이렇지 않습니까? ‘주님 가만히 계십시오. 주일날 만납시다. 왜 이렇게 자꾸 내 인생에 간섭하려 하십니까?’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뼈아픈 회개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신학교 나오고 불철주야 성경 읽는 목회자들도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녀를 길러보면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첫 마디가 ‘내가, 내가’입니다. 고집이 좀 센 애들은 신발을 신겨주면 그 자리에서 벗고 자기가 다시 신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인간의 죄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지난 한 해 점검하셔야 합니다. ‘주님 여기 계시기에’. 어떻게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저 거친 파도가 반석이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일만성도 파송운동을 새벽에 꿈으로 주셔서 얼떨결에 선포하고, 지난 8년간 말로 다할 수 없는 두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 여기 계시기에’.

여러분들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밝아오는 새해는 가평 우리마을이 오픈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제 다 드러낼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가평 우리마을을 향하신 주님께서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만성도 파송운동도 8부능선은 넘었다고 봅니다. 동료들부터 선후배 목회자들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걱정하셨는지 모릅니다. 대혼란을 우려하셨습니다.

그러나 파송운동에도 주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교회에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말씀을 같이 나누는 성도님들 가정에서도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내 결핍과 고통의 문제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더불어 ‘내가 내가’ 해선 안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나폴레옹 아닙니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그것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런 말 대신 ‘주님 여기 계시기에’라고 하셔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균형이 중요합니다. 결핍과 고통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적극적 삶의 태도를 가졌을 뿐 아니라 그것이 내 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주시는 힘, ‘주님 여기 계시기에’ 정신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 정신과 균형을 우리가 배웁시다.

이 야베스의 두 가지 기도제목이 우리 교회와 가정, 개인의 기도제목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드린 기도는 두 가지였습니다.

1.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이 말씀은 너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만 설명을 드리겠다. 이 기도제목의 배경은 예전에 나온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상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세 약속의 땅을 분배하던 때였습니다. 지금 야베스의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시길 원한다’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을 주시겠다는 그 땅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발견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바탕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신 19:8)”.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기도가 회복되길 원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말씀이 회복돼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모르는데, 무엇을 근거로 기도하겠습니까? 무속적 신앙을 바탕으로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들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을 늘 마음에 품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야베스에게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탕으로 근거로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고통스러운 현실 문제를 해결함받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오히려 자기 지경을 넓히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다 시카고 대화재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20대 때 시카고로 이민을 가서 보니, 도시 계획이 너무 잘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에 가면, 야경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바둑판입니다. 미시간 호수를 품은 중심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공학적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어떻게 도시 설계가 이렇게 잘 돼 있나 보니, 1871년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불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10만명 이상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됐고, 온 중심가가 다 불에 탔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파괴될 정도로 끔찍한 사고를 당했지만, 이후 재건을 통해 가장 중심지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묵상하다 왜 이것이 떠올랐을까요?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는 말씀에, 고통을 겪은 아들이었음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결핍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주님 여기 계시오니’, 늘 그 문제를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가다 보니, 그 결핍의 문제만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하나님이 신뢰하고 사랑하시는 성숙으로 바뀌어갔다는 것입니다.

‘잔병 치레 많은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진 결핍의 문제가 기도하니 없어졌습니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늘 결핍의 문제를 갖고 새벽마다 저녁마다 은혜를 구하면, 결핍의 해결은 덤으로 따라오고 그 과정에서 영적으로 성숙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붙잡는 인생으로 예수님 닮은 인격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힘든 나그네길 인생에서, 결핍과 고통의 문제를 야베스처럼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지경이 넓어지는 재료가 되고 도구가 되도록 배우면 좋겠습니다.

또 한 가지, 이렇게 야베스가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바탕으로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를 보면서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 81:10)”.

우리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이런 말씀으로 강조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도 입을 크게 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필요를 채우시는지 경험해야 합니다.

제 인생에서 이 말씀은, 참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야베스와 같은 인생의 길, 대학 졸업 이후 막막했던 삶이 시작됐을 때 하나님께서 ‘입을 크게 열라’고 해 주셨습니다. 다른 말로는 생각의 폭을 넓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면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입니다.

아웅다웅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20대 때 주님을 만나고 이것을 실천하고 누리는 복들이 자꾸 내면에 쌓여가니, 일만성도 파송운동이라는 너무 두려운 일까지 할 수 있는 담력이 생겼습니다.

새해에는 꽃게처럼 남 끌어내리기 바쁜 눈으로 아웅다웅 사는 것이 아니라,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신 이 말씀이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개인의 삶에 채워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맛보는 놀라운 새해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 넓혀야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밭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1-13)”.

그렇게 많은 은사를 가진 고린도 교회였지만, 허구헌날 다투고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그런 교회에 사도 바울이 요구한 것은 ‘마음을 넓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한민국의 분열과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우리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지 않으면 적으로 치부하는 이 세대 속에서, 예수 잘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을 더 넓히면 좋겠습니다. 포용이 넓어지고 관용이 넓어지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는 것이 분열을 해결하는 첫 단추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야베스는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 이름이 ‘근심’에서 유래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야베스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이 사사기 21장 8절인데, 여기 ‘야베스 길르앗’은 ‘황량한’이라는 뜻입니다. ‘약자, 소수, 비운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야베스라는 인간의 출생을 놓고, 많은 학자들이 ‘아버지가 없었을 것이다, 빈곤층이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이런 이름을 야베스는 늘 인식하면서, 황량한 길르앗 땅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길 원합니다”.

저도 한때 열등감이 많아서, 20대 때는 저 자신을 야베스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걸어다니는 열등감, 움직이는 열등감이었고,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 때는 어부에게 잡힌 꽃게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난도 많았고,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내쳤습니다.

이 황량한 길르앗 땅과 같은 처지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갔고, 이것이 저의 약함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커지고 누가 뭐라고 칭찬해도, 저는 제 출발을 알고 있기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야베스 길르앗, 황량하고 결핍이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임을 알고 있습니다.

결론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스로를 이런 황량한 야베스 길르앗,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나를 비참한 열등감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기도의 도구로 나아가야 합니다.

야베스는 지금 자신의 문제를 갖고 나아가는데,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절박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이런 기도를 보면서 누가복음 18장의 시각장애인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 18:35-41)”.

시각장애인이 외쳐 일렀습니다. ‘크라이 아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습니다, 가정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자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이런 수많은 결핍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외쳐야 합니다.

올 한 해, 이 절박함을 회복하길 원합니다. 야베스는 날 때부터 이런 결핍과 고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결핍으로 시작한 야베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격적, 영적 성숙, 사람들이 주목하고 하나님이 주목하는 인생이 되기까지, 얼마나 부르짖어 외쳐 기도하는 시간들이 많았겠습니까?

결론을 맺겠습니다. 올해의 성구는 시편 71편 14절입니다. 오가면서 읽고 암송합시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설교자: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일시: 2020년 12월 31일-2021년 1월 1일 송구영신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