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에 대한 주제를 말하면, 대개 사람들은 ‘마음 수양(mind cultivate)’ 혹은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 등을 떠올리고, ‘오직 믿음(Sola fide)’만을 강조하는 ‘기독교 영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러나 성경은 ‘마음은 생명의 원천’이며, “모든 주의를 다 기우려 지켜야 할(Keep thy heart with all diligence, 잠 4:23)” 대상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성화의 차원’에서이지, ‘칭의나 구원의 차원’은 아니다.

존 오웬(John Owen, 1616년-1683)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존 오웬은 ‘마음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마음을 지키는 일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마음을 지키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일치가 될 것이며, 우리 삶의 목적은 그를 따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해 버린다면, 이 지상에서는 순종을, 이후에는 영광을 잃어버린 생활이 될 것이다.”

존 플라벨(John Flavel, 1627-1691)은 ‘심장과 몸’의 관계를 ‘거룩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하여 “전체적인 몸의 상태는 심장의 건강과 활력에 달려 있고, 사람 전체의 영원한 상태는 ‘그 영혼의 상태가 선한가 악한가’, 곧 ‘마음을 지키는가(keeping the Heart)’에 달려 있다”고 했다.

아더 핑크(Arthur Pink, 1886-1952)는 “마음은 우리 책임 영역의 중심에 있으며, 마음을 개선하고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는 말로서 마음의 극단적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청교도들은 일치되게, 외적인 봉사나 업적보다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을 일생일대의 책임으로 여겼다. 종교적 일들이 다만 일과성 이벤트로 끝나고, 종교 의무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업적으로만 가늠되는 작금의 기독교 현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생각을 다스림

이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생각(thought)’을 ‘지성(intelligence)’의 영역에 둘 것인가, ‘마음(mind)’의 영역에 둘 것인가부터 결정해야 한다. 그것의 예속 영역에 따라 개념 정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적 생각(intelligent thought)’은 ‘내면의 자각’ 혹은 외부로부터 정보를 수용하고 그것을 분석, 판단하는 ‘기능적 차원’에 가깝다.

이에 반해 ‘마음의 생각(thought of mind)’은 올바르게 생각하고, 도덕적인 의지 결정을 하는, 곧 정신의 도덕적 상태의 총체로서 생각의 태도와 방법(롬 12:2)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서의 사상, 주장, 천명. 정서, 갈망, 소원(롬 1;24), 사랑(막 12;30)까지 아우른다.

이렇게 ‘생각’을 구분짓는 것은 학자들에게 있어 그리 생소한 일이 아니다. 개혁주의 교육학자 페리 다운즈(Perry G. Downs) 역시 자신만의 독특한 구분법으로 ‘지식의 창고로서의 지성’과 ‘사고방식으로서의 지성’으로 나눈다.

“발견 학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개념의 창고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정신을 사용하도록 가르친다(teaching for spiritual growth).”

나아가 그는 “만일 우리가 주위의 삶과 실체에 대해 하나님과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라면서, 교회 교육의 최종 목적인 ‘삶의 변화’는 마음이 변화되므로 성취되며, 그 ‘마음의 변화’는 단지 ‘신앙적 정보를 획득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기독교인답게 생각하는 것’에서 온다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과 같은 생각’, ‘성경적인 사고방식’이란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는 ‘수납적인 사유(receptivity principle of thought)’를 뜻한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계시의존 사색(the revelation-relied thinking)’ 혹은 ‘순환 추론(circular reasoning) 사유’이다.

이는 코넬리우스 반틸(C, Van Till, 1895-1987) 교수가 ‘무신론적 사유’를 인간 스스로의 독립적 사유(思惟)로, ‘유신론적 사유(思惟)’를 ‘하나님 사유(思惟)의 수납(순환적 추론 사유)’으로 규정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기독교 혹은 유신적 문화는… 수납적인 사유(思惟) 원리에 의해 컨트롤된다. 이런 수납을 갖지 못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며 인간 문화도 갖지 못한다(foundations of christian education).”

그는 ‘생각’을 하나님 자녀와 세상의 자녀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유신론-무신론을 가르는 기로로, 순종과 반역의 갈림길로 보았다. 그리고 ‘생각’은 단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내면적 태도에 국한되지 않고, 그 사람의 전 삶의 흐름을 주도한다.

아더 핑크 역시 ‘생각과 삶의 긴밀성’을 역설한다. “만일 우리 마음 속에 불경건과 교만, 탐욕, 적의, 불순한 욕망이 거주하게 된다면, 우리 생활의 전 흐름은 이러한 악으로 크게 오염될 것이다(practical christianity).”

이렇게 삶의 흐름을 주도하는 ‘생각’은 당연히 모든 인간관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약 2:4). 어떤 심리학자가 ‘노년의 이혼’이란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혼의 원인 중 많은 경우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혼의 해결책 역시 다른데 있지 않고, 부부가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을 바꾸는 것에 있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이는 ‘생각’은 결코 인간 내면에 국한 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감정과 지성을 다스림

‘마음’에 해당되는 헬라어 ‘καρδίας’이 감정이나 충동, 애정 ‘감정’에 가까운 것이라면, ‘νοήματα’, ‘νουν’은 이해력, 통찰력, 판단 같은 ‘지성적 측면’에 가깝다. 이처럼 ‘마음’은 다양한 매커니즘을 가지며, 그것들의 ‘균형 있는 사용 여부’를 통해 그의 ‘인격의 건전성 여부’를 나타낸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 경향성은 대개 한쪽으로 편향되기 일쑤이며, 이는 신앙에도 예외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의 ‘감정 일변도’ 혹은 ‘지성 일변도’ 신앙 현상은 일종의 그런 쏠림 현상의 반영이다. 전자는 신앙을 감정(체험)과 거의 동일시한다. 그들은 말씀보다는 자기의 체험, 감정을 우위에 둔다.

일찍이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감정주의(emotionalism) 신앙’의 부작용을 알고 성도들에게 그것의 경계심을 고취시켰다.

“감성에 대한 개혁주의의 거부는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곧 열성적인 감정을 추구하며 예수와의 친밀한 느낌을 충성의 궁극적 평가 기준으로 삼는 잘못된 경건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다. … 마음이란 이러한 잘못된 인도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Howard L. Rice).”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역시 ‘믿음’이 아닌 ‘감정적인 느낌’에서 뭔가를 확증하려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낌으로 확인하려 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면 했다. 여기서도 예외 없이 그의 ‘오직 믿음’의 신학은 확인된다.

반대로 감정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 경향 역시 경계해야 한다. ‘희노애락(喜怒愛樂)’은 인간의 본능이다. 성경 어디에고 감정을 죄악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곳은 없다(전 8:15). 올바른 감정 표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 되고,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교제의 좋은 방편이 된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감정 표현을 천박하게 보고, 감정을 엄금하는 스토익(stoic) 철학자들을 경멸했다. 그는 ‘사용은 하나 즐기지는 않도록 한다’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신조(信條)를 스토아주의(stoicism)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으며, 모든 인간성을 내던져 버리고 마치 목석처럼, 곤경의 때나 번영의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동요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토아주의를 비웃었다.

그리스도의 감정은 그의 인간성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 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불행에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적극적인 감정 반응을 보였다(요 11:35 눅 19:41 마 20:34; 21:12-13).

우리는 신앙에 있어 지나친 감정주의는 경계하되, 경건한 신앙을 ‘감정을 느끼거나 표출할 줄도 모르는 것’으로 오도하는 일 역시 없어야겠다.

기독교사에서 ‘지성’과 ‘감정(체험)’의 조화를 잘 이룬 사람 중 하나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이다. 그는 당대의 메마른 주지주의(intellectualism, 主知主義)를 준엄히 책망했으면서도, 믿음의 감정적 측면은 이성의 지배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견해 역시 견지했다.

“분명한 진리는 고조된 감정이 아니라 계몽된 정신이 항상 인간이라고 불려지는 자들의 안내자가 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다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에도 역시 그러하다.“

◈노동과 마음 다스림

‘마음이 행동’을 이끌기도 하지만, 반대로 ‘마음이 행동’의 영향을 받는다는 고전 심리학 이론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노동’을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는 도구’로 삼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는 ‘마음과 행동’이 상호 유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개혁주의의 전인성’ 원리 때문이다.

‘노동’은 복잡한 의식을 단순화시키는 일종의 정지(整地) 역할을 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창세기 2장 1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노동을 단순한 ‘문화 명령’ 이상의 ‘정신의 단련 혹은 경건의 방편’으로 보았다.

“육체 노동이야말로 인간 지성 활동을 보완할 뿐더러 수덕(修德) 생활 그 자체에 불가결한 요소이다. 노동은 육체의 단련이며, 정신의 단련도 된다. 인간은 자기의 어느 한 부분만으로는 자기를 완성하지 못한다(St. Augustine, Thoughs: Pensées, 명상록).”

신비주의자들이 노동을 경제나 재화의 목적보다 오직 ‘기도와 영성의 방편’으로 삼는 것은 지나치게 ‘내면 지향적이고 반(反)역사적인 노동관’의 반영이나, 노동이 ‘경건의 한 방편’일 수 있음을 타진해 준 점은 긍정할 만하다.

개신교가 ‘노동’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성한 의무’요(창 2:15; 3:19, 살후 3:10)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공공의 선에 기여하는, ‘하나님의 소명(召命)’으로까지 격상시킨 점은 훌륭하다. 그리고 이런 적극적인 ‘노동관’이 경제 부흥의 동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을 ‘경건의 방편’으로까지 끌어 올리는 데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는 어쩌면 노동을 지나치게 내면화시킨 ‘수도원주의’, ‘신비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 있어, ‘노동과 경건’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에겐 영성과 일이 철저히 통합되어 있었다. … 청교도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에게 열심 어린 육체적, 정신적 노동은 유혹을 저항하게 하는 수도자적 기술이었다(Allen Carden, puritan christianity in America).”

육체노동, 근면한 활동은 마음을 단순하게 하고 사람을 사념(邪念)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준다. ‘정신노동’이 주를 이루는 ‘4차 산업시대’에 웬 육체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나, ‘경건의 방편으로서 노동’의 의미를 한번 재고(再考)해 보자는 의미다. 할렐루야!

※ 본 칼럼 내용은 2005년 출판된 이경섭 목사의 저서 <개혁주의 영성체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