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
▲영화 <사도> 중 한 장면.
본문: 마가복음 14장 53-72절


배우는 연기를 잘해야 한다

<사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 영화는 가족사에 집중을 해서 어떤 순간에도 왕이어야 했던 아버지 ‘영조’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들이고 싶었던 사도세자 사이에 일어나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들을 쌀 뒤주에 가두어 죽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 영조와 그런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갈등…, 참 슬픈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영조의 역할은 송강호 씨가 했고, 사도세자의 역할은 유아인 씨가 했습니다. 이 영화 감독인 이준익 감독에게 송강호와 유아인의 연기가 어땠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송강호라는 배우가 ‘영조’이고,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사도’다 라고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왕 역할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송강호는 ‘영조’ 그 자체였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매 순간 단 일초도 ‘영조’가 아닌 적이 없었고,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과정에도 ‘사도’ 역할에 계속해서 유아인을 떠올렸습니다. 유아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반골 기질이 ‘사도’를 느끼게 했고, 연기 디렉션 없이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말은 한마디로 그들의 연기는 100점이었다는 것입니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충분히 잘 살리고 표현에 내는 사람들입니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어떤 배역을 맡으면 그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 실제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가서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만일 의사 역을 맡았다면 의사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자신이 의사가 된 것처럼 살려고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은 어떤 역할을 맡겨도 그것을 다 소화해 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원하신다

우리는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의 실제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이 영화 속에 맡았던 인물의 삶이 실제 삶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 드라마 속에서 연기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는 진짜의 나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연기를 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남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연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그 연기를 보면서 열광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의 삶 가운데 연기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연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연기 잘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설프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가식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연기하지 않았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장면이 너무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잡혀 대제사장 가야바에 뜰로 끌려가게 됩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시는가를 지켜보기 위해 제사장의 뜰 안에 가서 앉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거를 찾기 시작합니다. 거짓증인이 많이 왔지만 실제적은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거짓으로 증언하기를 예수님이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증언 역시 서로가 일치하지가 않았습니다. 답답한 대제사장은 제대로 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어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죽일 증거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추깁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예수님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딱 걸렸다는 식으로 자기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함께한 자들은 이는 사형에 해당된다고 동의를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때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예수님은 얼마든지 대제사장 앞에서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연기를 하면 인간들에게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들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연기

베드로는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간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면서 고난 가운데 있는데, 베드로는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이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방금 전 예수님을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마치 주님을 지켜 줄 것처럼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단칼에 베어 버렸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과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왠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 베드로가 주님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든 것이라면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뜰에 같이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같이 죽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헌장담을 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 베드로의 모습일까요? 살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모습이 진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주님 앞에서 칼을 빼든 것은 베드로가 연기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금까지 지켜보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일으키는 기적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물 위에서 예수님이 오라고 하셔서 물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 한 마디로 성난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현장에 베드로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기위해 왔을 때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행하실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대로 잡혀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자신이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라는 것을 연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칼을 빼들었습니다. 주님이 나머지는 다 수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면서 힘없이 잡혀갔습니다. 그래도 혹시 잡혀가셔서 무슨 일을 행하실 줄 알고 가만히 뒤따라가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침을 뱉고 때리는 데도 그냥 힘없이 맞고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본 베드로에게 여종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니 베드로는 이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기위해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맞는 모습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두 모습이 자꾸만 클로즈업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 가운데 나도 베드로처럼 혹시 연기를 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 앞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내가 칼을 빼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연기가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 연기가 통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연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연기를 하는지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지 압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이 연기를 하는지 진짜 모습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 앞에서도 연기가 통하는 줄 압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네 것 내 것이 없는 공동체였습니다. 집이나 밭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 판값을 사도들에 발 앞에 두면 사도들이 각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도 이런 교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소유를 팔고 그것을 다 사도들 앞에 갖다 주려 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아내 삽비라 몰래 재산의 얼마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남편이 감추어 둔 다고 아내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다. 아내인 삽비라도 아니니아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알면서 눈감아 주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소유를 판 것 중에 얼마만 베드로 앞에 갖다 두었습니다. 아나니아는 마치 그것이 소유를 판 모든 돈인 것처럼 연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도들이 속아 넘어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알게 하셔서 아나니아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 차렸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옛날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일로 인해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아나니아는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하고 거짓말을 하면 다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아나니아의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한 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아나니아는 분명히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연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요 연기를 한 것이라고 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것,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베드로 앞에서 비록 자신의 거짓말과 연기가 다 들통이 났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는 들통이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연기를 잘 해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지켜보시는 분이시기 결국 하나님을 속인 것과 똑같이 보십니다.

‘척’ 하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한다

때론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서 상대방을 위해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성도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힘들다고 “오늘은 말씀을 전하지 않을 테니까 기도하고 돌아가십시오” 하면 안 됩니다.

힘들더라도 강대상에서 목사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상대가 슬픔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다면 아무리 내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어서 상대와 같이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약하면 약한 모습 그대로, 믿음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포장하면 안 됩니다. 연기하면 안 됩니다. 곧 ‘척’하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척, 믿음 있는 척, 주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심을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가면을 벗어야 한다

중국의 변극을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순식간에 가면이 바뀌는데 참으로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가면을 바꿀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인간들의 삶에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 쓰는 가면이 다르고 직장에서 쓰는 가면이 다르고 친구들을 만났을 때 가면이 다르고 교회 왔을 때의 가면이 다를 때가 혹시 있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정말 어느 것이 내 진정한 얼굴 인지를 모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인터넷에서는 대부분 닉네임을 쓰지, 자신의 실명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공개적으로 해야 이용할 수 있는 사이트는 실명을 밝히기도 합니다. 그 외에 실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인터넷상에서 쓰는 닉네임이 일종의 가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가면을 쓰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가면을 쓰고 온갖 말들을 다 쏟아놓습니다.

인터넷에 댓글이 달린 것을 보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만일 신상을 다 밝히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한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함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가면을 벗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가끔씩 등산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참 마음이 좋습니다. 도심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신선함과 편안함을 느낍니다. 같은 바람인데도 도심 속에서 느끼는 바람과 자연 속에서 느끼는 바람이 다른 것 같습니다.

자연을 가만히 보면 전혀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연기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을이 되면 온갖 색깔로 물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겨울이 되면 앙상 가지만 남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자연 만물을 인간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때론 그 자연 만물들을 보고 배우라고 우리에게 곁에 두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가면을 벗고 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울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해서 연기를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우리가 연기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그래도 내가 잘 압니다. 내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먼저 정직하자는 것입니다.

내 자신 앞에 정직할 수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 연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스스로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의 거울 앞에서 비추어 봐야 한다

둘째,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거울입니다. 거울은 우리의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가꿀 때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자 분들이 화장을 하실 때 꼭 거울을 보고 하지 않습니까? 옷맵시를 볼 때도 꼭 거울을 봅니다. 그리고 거울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은 나에게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무엇이 묻었으면 그것을 닦아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늘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비추어 보고 흠이 보이면 그것을 닦아내야 합니다.

매일 비추어 보기 힘드신 분들은, 주일날 만큼이라도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연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조금씩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변화되게 됩니다.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연기하며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연기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모습은 포장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다. 좀 부족하더라도, 좀 연약하더라도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