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6)심리주의의 경계

개혁주의가 마음을 중시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중시하는 만큼만이다. 성경이 ‘마음을 생명의 원천(잠 4:23)’이라고 한 것은 마음이 ‘영혼과 믿음의 좌소’라는 점에서이지, 심리주의(psychologism, 心理主義)가 말하듯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에서가 아니다.

특별히 마음의 ‘감성적 측면’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일부의 풍토는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성경 말씀보다는 자유로운 감성의 흐름을 좇아 나오는 느낌과 생각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단언해 버리는 모습들은 ‘마음의 생각 따라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과(겔 13:2) 18-19세기 칸트(Immanuel Kant),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로 대변되는 낭만주의(romanticism)를 연상시킨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렘 17:9)”이라고 했다. 개혁자들이 마음을 중시했지만, 마음과 감정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주진 않았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마음의 문제’로 귀착(歸着)시킬 때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외부 세계에 대한 모든 관심을 차단한 체 오직 ‘내면지향적인 종교(inner-directed religion)’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우주론적 통치’와 ‘신앙의 역사성(歷史性)’을 좌시하게 하고, 기독교 신앙을 개인의 내면 체험과 동일시하는 ‘신비주의(mysticism)’로 전락시킨다.

그들은 ‘외면적 활동’을 ‘내면의 영성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다. 예컨대 노동의 목적을 ‘생산이나 재화’ 획득에 두기보다, 주로 ‘기도와 묵상’같은 영성의 방편으로 삼는다.

나아가 그들은 항상 우주보다 광활한 ‘내면 세계’를 강조하고, ‘내면에로의 여행’을 우주 탐사를 능가하는 영웅적 모험으로 칭송하며 신비주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영성신학자 달라스 윌라드(Dallas Albert Willard)가 지적하는 대로, 믿음이 이렇게 ‘마음만의 문제’로 축소될 때, 진리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기독교의 관습에 있어 가장 기만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모든 문제는 우리의 내면적 감정, 이념, 신념 그리고 의도라고 생각하는 개념이다.

무엇보다 구원을 삶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우리에게서 하나님에 관한 생명력 있는 진리들을 박탈해버리고, 몸으로 하여금 죄를 방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 심리에 관한 이같은 실수에 기인한다.”

개혁주의는 내·외면의 영성을 모두 중시한다. 이는 하나님은 기도, 묵상 가운데서만 역사(役事)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명실공히 ‘보이는 세계(the visible world)’와 ‘보이지 않는 세계(the invisible world)’의 왕으로 모시려는 개혁주의 신자들은 이 둘 중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7) 하나님과 사람의 일터인 마음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중생(regeneration, 重生) 역사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터’이다. 그것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과 조명(고후 4:6)으로 된다. ‘마음’이라는 헬라어 καρδια, νουν, νοηματα 가 함의한 ‘비췸을 받는 장소’란 뜻 그대로이다.

인간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 노출되는 자신의 비천함을 직면하여 겸손케 되고, 독생자를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빛’으로 그의 마음에서 ‘죄와 어둠’이 추방된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기독교의 ‘마음 경륜(mind administration)’은 ‘하나님 의존적’인 것으로 규정되며, 인간 주도의 ‘마음 수양’이나 ‘심리 요법’과는 구별된다.

동시에 ‘마음’은 ‘인간의 일터’이기도 하다. 이는 ‘믿음의 좌소’인 ‘마음’이 예측 가능한 ‘발달적 측면’을 가졌고, 둘(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교호(交互), 동역(同役)해 나가기 때문이다.

저명 개혁주의 기독교 교육학자인 트리니티 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페리 다운즈(Perry G. Downs) 교수는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믿음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적인 현상이므로(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지만 인간이 발휘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경험하는데 전인적 관점이 필요하다. 믿음은 전인을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발달 환경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

‘믿음의 발달 이론’은 성경적 근거와 함께 ‘발달심리학’에도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발달적 측면은 전인(全人)의 균형 있고 조화로운 성장을 요구하며, 이를 위한 정당한 방법들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페리 다운즈가 기독교 교육의 완성을 ‘생각과 행동의 조화로운 발달’로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 교육이 효과를 거두려면, 영적 성장에서 정신이 하는 역할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는 생각의 방법이 하나님 백성이 되는 중요한 일면이 된다고 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의 관계’에 관한 성경의 명령을 따르며, 기독교인의 삶에서 ‘인식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 모두를 중시해야 한다(Teaching for Spiritual Growth).“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결코 ‘마음의 역할’을 좌시하지 않게 한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l) 교수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 이성, 의식’을 사용해야 한다(An Introduction To Sysyematic To Theology)“고 한 가르침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8) 돌봄을 필요로 하는 마음

‘오직 믿음(sola fide)’의 종교개혁 원리가 ‘마음 돌봄(mind care)의 필요성’을 없이하지 못한다. 이는 ‘전인적 영성’의 관점에서 육체를 보양하듯 마음도 보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한 부분이 약할 때 섭생(攝生)을 하듯, 마음과 심리상의 문제가 있을 때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개 기독교인들은 ‘마음의 문제’는 오직 ‘영적 차원’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은혜만 받으면 마음도 저절로 건강해질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이다. 특히 정통 보수 신앙인 일수록 그렇다.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는 아마 ‘은혜의 지위’를 높이려는 생각과 함께, 기독교 신앙을 ‘마음의 문제’로 격하시키는 ‘심리주의(psychologism, 心理主義)’에 대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중생, 믿음’ 같은 초자연적 역사가 발생하는 ‘특별 은총의 영역’인 동시에 인간 심리의 보편적 원리가 작동하는 ‘일반 은총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음의 이중성’이 ‘특별은총 영역’으로서 그것의 지위를 약화시키거나, 바울, 루터가 말한 ‘자연적인 것(the natural)과 영적인 것(the spiritual)’의 대립성(롬 8:6)‘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이 ‘영적 좌소(座所)’인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현상이 작용’하는 곳, 곧 ‘특별은총 영역’으로서의 ‘영적 배려’가 필요한 동시에 ‘일반은총 영역’으로서의 ‘심리적 배려’도 필요한 곳임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둘 다 똑같은 일반 은총의 영역임에도 ‘육체’에 어떤 돌봄이 필요할 땐 별반 ‘신학적 의식’ 없이 곧 잘 배려하면서도, ‘심리적 배려’가 필요할 땐 엄격한 ‘신학적 잣대’를 들이대며 소극적이 된다.

예컨대 위장이 약한 사람은 섭식(攝食)에 주의하고, 간 질환자는 무리한 활동을 자제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이에 대해선 육체주의니 인본주의니 하며 신학적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마음’과 ‘정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땐 ‘신학적인 경계심’으로 인해 그것을 돌보는 덴 인색하다.

누가 조급하고 분노를 잘한다면 ‘영적인 돌봄’과 함께 ’분노 가라앉히기‘, ’느긋한 마음 갖기‘ 등 마음 돌봄(mind care)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비기독교적인 ’심리 요법‘이니 ’마인드 컨트롤‘이니 하며 그것을 차용하는데 주눅들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런 노력은 없이, 습관적으로 ’조금함과 분노‘를 발하면서 기도로만 ‘마음의 평안’을 간구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마치 ‘위장병 환자’가 폭식을 하며 그것의 치유를 간구하는 것과 같고, 과속 운전을 하며 안전운행을 간구하는 것과 같다.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려면 기도, 말씀 같은 영적 방편들의 사용과 함께 ‘마음 돌봄’도 필요하다. 예수님도 그것의 필요성을 인정하셨다.

복음 전도에 수고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와서 쉬라(막 6:31 마 26:45)“하고, 기도를 마친 제자들에게 ”자고 쉬라(마 26:45)“ 한 것은 그들에게 ‘영적 안식’ 외에, ‘육체와 마음의 안식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9) 담겨지는 곳

‘마음의 생각’은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궤적을 남기고, 축적되기까지 하며 후에 그것이 그 사람의 ‘성향과 인격’이 된다.

누가 ‘시간은 흘러 소멸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 역사를 이룬다’고 했듯, ‘마음의 생각’ 역시 소멸돼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담겨지고 축적된다.

“새가 머리 위로 나를 수는 있어도 머리 위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라”는 루터(Martin Luther)의 말처럼,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나쁜 생각까지야 통제할 순 없지만 나쁜 사념(邪念)들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쁜 생각은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고 선한 생각은 습관화하여 그것이 우리의 성향이 되도록 까지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음의 ‘저장과 출고(Warehousing And Release)’원리를 말할 수 있다.

창고에 쌓은 곡식을 필요에 따라 꺼내 오듯, 선·악간에 내면에 쌓은 축적물에서 그것을 꺼내어오기 마련이다.

우리 마음이 쉽게 악에 굴복되고, 의도한 선한 방향으로 마음을 끌고 가지 못하는 것은 거룩한 생각들을 축적하지 못한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눅 6:45)”라고 한 말씀 그대로이다. 17세기 청교도 C. W. 구르날도 같은 말을 한다.

“물이 입구까지 가득 차서 한 번 만 펌프질을 해도 물이 쏟아져 나오는 그런 우물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마음도 그렇게 영적이지 못하며(우리가 세상적인 화제에 대단히 조심함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끌어올리고 고양시킬 그 어떤 것이 없다면 하나님께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향하지는 못한다.

은혜의 샘은 보통 너무도 깊어서 한 번의 펌프질만으로는 마음이 기도하는 기분이 들도록 하지 못한다.”

한두 번의 간헐적인 거룩한 생각, 이따금씩 주를 찾는 것만으론 그것을 밖으로 길어 낼만큼의 충분한 원천(原川)으로 만들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주와 교통하며 거룩한 생각으로 채워진 사람만이, 내어 올 것이 가득한 ‘마음 창고(storage of mind)’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예배를 비롯해 모든 영적인 사역을 행할 때 억지로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할 필요가 없다. 솟는 샘처럼 언제 어디서나 그 흘러남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에 쌓은 것 없이 밖으로 내어 놓으려고만 한다. 이는 마치 마른 우물에 두레박질 하는 것과 같으며, 모든 것이 연기(演技)를 하는 것 같고,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부자연스럽다.

’마음‘의 ’담겨지는 측면‘의 무시, 곧 ’존재론적인 영성(ontological spirituality)‘의 좌시는 정통신학에서 중시하는 ‘관계론적 영성(relational spirituality)’ 일변도로 흐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관계론적(relational)‘이고 동시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관계론적이고, 그 안의 ’성령 내재‘는 존재론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관계(relation)’와 ‘존재(onto)’의 상호 교호작용(interaction)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의 모델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이다. ’성자와 성부‘, ’성부와 성자‘의 믿음과 사랑은 관계론적(relational)이고, 두 위(位)의 일체(一體)와 상호 내재(內在)는 존재론적(ontological)이다.

이 ‘관계와 존재의 교호(交互)’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중 ‘기도’를 한 예로 든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면, 기도가 습관(존재, onto)이 되므로 그것은 담겨지는 ‘존재론적(ontological)’인 것이 된다.

예수님의 기도생활 역시 그랬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눅 22:39).”

이처럼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메카니즘(relational mechanism)’이 작동되는 곳인 동시에 지속성과 반복성으로 형성된 습관이 담겨지는 ‘존재론적(ontological)’ 곳이다.

그리고 그 ‘담겨진 습관(onto)’은 ‘관계(relation)’를 용이하게 하므로 둘이 선순환 구조(virtuous circulation)를 형성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