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영화 <동주> 중 한 장면. 동주(강하늘)와 몽규(박정민).
본문: 창세기 11장 27-32절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민족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라고 합니다.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 시인을 기리며 <동주>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좋아했던 윤동주 시인을 너무도 몰랐던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동주이지만, 또 다른 주인공이 한 명 더 등장합니다. 동주의 사촌인 송몽규입니다.

동주와 몽규는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이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합니다. 또한 같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는 길은 달랐습니다. 동주는 시를 쓰고, 몽규는 독립을 위해 총을 듭니다. 몽규는 동주가 걱정되고, 동주는 몽규가 걱정됩니다. 동주는 적극적으로 몽규처럼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인 육첩방에서 시를 쓰는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결국 동주와 몽규는 둘 다 후쿠오카 감옥에 잡혀가는데 일본인 경관은 동주와 몽규를 따로 따로 심문하면서 이들을 죽이기 위해 그들이 하지도 않는 진술서에서 사인을 하도록 합니다.

이 때 몽규는 일본인 경관이 써놓은 진술서대로 정말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울면서 서류에 서명을 합니다. 하지만 동주는 울면서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원하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나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습니다”라며 진술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종이를 찢어버립니다.

결국 둘 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27살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영화는 동주가 죽기 전 감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과 감옥의 창살을 통해, 수많을 별들이 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동주의 목소리로 서시를 들려줍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의 주제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지용 시인이 동주에게 해준 말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지용 시인은 동주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지.”

그러면서 이준익 감독이 덧붙이길, 부끄러움을 인정하기만 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요,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이것이 부끄러움이 주는 선물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세상에는 부끄러움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움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생의 목적도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정말 산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대가족 중심의 사회

아브라함이 살았던 사회는 대가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것은 그 당시 사회 자체가 자급자족해서 살아야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충분한 노동력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방어력을 갖고자 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 힘을 합해 필요한 경제적 가치들을 생산해낼 수 있었고, 대가족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사회적 안전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대가족이 더욱 확대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고대 사회의 부족국가였습니다.

따라서 한 구성원이 이 대가족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다거나 자신의 부족에서 스스로 이탈해 나온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경제생활 뿐 아니라 생명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란에서 죽은 데라

본문 3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 11:31)”.

부족국가라는 시대적인 상황 가운데, 아브람과 그 아버지 데라는 편안하고 안전한 사회적 보호막을 걷어 버리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살아갈 수 없는 그 길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길에 쉽지 않은 실패와 좌절이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데라와 그 맏아들 아브람이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라가 머무는 곳은 가나안이 아닌 하란이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결국 그는 죽고 맙니다.

왜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하란에서 죽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병이 들었거나 늙어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이와 관련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나지 않은 데라

창세기 12장 4절을 말씀을 보면 하란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11장 26절을 보면 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때가 70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32절 말씀을 보면 데라는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근거로 생각을 해보면, 아브라함은 아버지인 데라를 하란에 남겨두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갔다는 이야기이고, 데라는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으로 떠나간 뒤에 하란에서 60년을 더 생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째서 데라는 아브람과 함께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째서 아브람은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간 것일까요?

만일 데라가 늙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데라가 병들어 움직일 수 없었다면, 아브람이 떠나간 뒤에도 60년이나 더 살았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또 어떻게 병든 아버지를 수만리 떨어진 타지에 홀로 내버려두고 떠나겠습니까? 그 길이 아무리 급해도 아버지를 치료하고 함께 가지 않았겠습니까?

데라의 입장에 보더라도, 만일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의 그 열정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 뒤에라도 가나안을 향해 아브람을 뒤쫓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까지는 왔지만 더는 가기를 싫어하고 하란에 주저앉고 만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 7:2-4)”.

이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가 데라가 죽은 이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기 계산대로라면,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데라의 나이 145세였고 그 후 60년을 더 하란에서 생존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 말씀을 보면 이미 데라의 죽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성경의 오류일까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앙 안에서의 죽음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로 산 데라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주님께서는 사데교회 사자를 향해 “살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비추어보면 육체적인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영적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 보면, 데라가 아직 하란에 살아있으나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브람과 함께 떠나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는 것 자체를 이미 죽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육체적 생명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미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데라가 아브람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의 사역을 위해 좇아 나선 것은 생명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데라가 스스로 이 길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떠날 올 때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이 어떤 어려움이었든지, 그가 그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고 도중에 주저앉아 버렸을 때 그것은 그대로 영적인 사망으로 이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자다

이 지구상에 지금 77억 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5천 2백만명 가까운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이 호흡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눈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몸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없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크리스마스 때가 가까이 오면 오늘날과 같이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트리가 없는 때라 산에 올라가서 전나무를 잘라다가 화분에 심어서 성탄장식을 하곤 했습니다. 전구도 달고 별도 달고 카드도 달고 나름 예쁘게 한다고 장식을 했습니다.

물론 요즘처럼 심플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 아름다웠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당장 살아있는 것 같고 화려해 보이지만, 성탄절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으면 불쏘시개가 되고 맙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되었던 전나무는 이미 뿌리에서 잘려진 순간부터 그 나무는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이 땅 가운데서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이기에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전나무와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죽은 전나무에다 장식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돈으로 장식을 하고 집으로 차로 세상의 것으로 장식을 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져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로부터 잘려 나간 저들을 다 예수님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은 자로 살아가면 안 된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죽은 자처럼 살아가면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된 신앙의 길을 힘차게 출발을 하지만 그 끝맺음을 다하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매여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생존하였습니다. 그 60년이 얼마나 편하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왕과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60년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60년은 가장 영광스러운 은혜를 상실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기념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가나안에서의 고난이 두려워 그 길을 포기하였다면, 그 고난 속에 보석처럼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함께 버린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 믿으십니까?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쿼바디스’란 라틴어로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의미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입니다. <쿼바디스>는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특별히 대형교회의 안 좋은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다큐멘타리 영화입니다. 실제로 인터뷰한 내용들도 담겨져 있고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는 장면들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목회 세습을 하고 교회 돈을 횡령을 하고 성추행을 범한 목사님들에게 동일하게 기자들이 던진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목사님, 정말 예수님을 믿으십니까?”이 질문은 그런 일을 하고도 예수님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니다

이 땅 가운데 교회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해서 다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해서 다 목사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지만 다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가서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하나님께서 무슨 의미로 예레미야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향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 땅 가운데 수많은 교회들이 서 있지만,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살아 있으나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교회만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마지막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노릇도 했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이들이 감히 주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밝히 말하는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직분도 감당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을 행했던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들은 비록 주님의 이름으로 직분도 감당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지만, 결국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운 저들을 향해서 불법을 행한 자라고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잘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너무나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라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 물속은 생명력이 넘칩니다. 하지만 물고기가 물속에서 죽으면 물을 오염시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있는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죽은 자로 살아가면, 오히려 세상을 오염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죽은 자로 살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못 맺는 것은 둘째 치고,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는 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나의 욕심과 유익을 추구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교회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붙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주님께 붙어 있는지 안 붙어 있는 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라

둘째,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33년의 짧은 생을 사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했던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몸과 삶은 우리를 사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은 덤으로 사는 인생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만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덤의 인생을 허락하신 하나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데라처럼 살아 있으나 죽은 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데 교회처럼 살아있으니 죽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교회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는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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