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구름, 하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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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 한 목사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작년 움직이는 교회(AMCM)로 다녀왔던 상주에서 목회하시는 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데도 소탈하고 겸손하십니다. 작은 것에도 리액션이 어린아이처럼 좋습니다. 전화를 드리면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전해들은 것처럼 “아이고 목사님!” 하십니다. 어색하게 답하는 제가 쑥스럽고 죄송스럽습니다.

2. 목사님께서 제게 사랑의 편지(아마 이 편지인가 봅니다)를 보고 감명(?) 받으셨다고, 그때 처음 만나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제 글들을 보고, 이런 목회자도 있구나 싶으셨답니다. 그리고 글로 목회하는 분인가보다 생각하셨답니다. 혹시 목사님 글, 책으로는 없냐고 물으셨습니다. 얼마 전 사랑의 편지를 모은 것으로 출간된 책을 선물해 드렸습니다. 그리곤 제가 쓴 글을 잠시 돌아봤습니다. 돌아보니 글은 뻔뻔하게 잘 씁니다. 또 한 사람이 속는구나 싶습니다.

3.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럽습니다.

글은 생각의 정리이기 때문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허물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여 정리하기 시작한 사랑의 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저녁, 그 날 그 시간이야말로 “다 끝났어. 좀 놀자”는 생각으로 변질되는 시간. 목회자에게나 성도에게나 위험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무너지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으로 시작한 것이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저의 약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자신을 묶어둘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저의 연약함을 보지 않고 글만 봅니다. 말은 또 얼마나 청산유수일까….

가급적 말을 줄이려고 노력해도 설교를 해야 하고, 설교한 제 모습을 보면 말은 또 그럴싸하게 합니다. (물론 강대상 위에서만 그런 것 같습니다.)

말한 것중 얼만큼 지킬까요? 제 스스로를 점검하기 위해 쓴 목회철학에는 이렇게 써 있는데 말입니다. ‘설교하려고 살지 말아라. 삶이 설교가 되어라.’

4. 목회자가 되기 전, 20대 후반부터 정리한 ‘신앙생활을 위한 철학적 사고’가 이제 목회철학을 정리하는 노트로 바뀌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중 일부분의 글을 크리스천투데이와 블로그 등에서 보셨다며, 혹시 책으로 낼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글은 제가 20대 후반부터 썼던 글들인데, 지금도 매년 업데이트를 합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제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쓴 글인데도, 제가 못 지키는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 오늘 제가 살아가는 것도 제가 만든 규칙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 같아요.”

규칙을 통해, 제가 그 규칙대로 살지 못함을 깨닫는 것. 그래서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구나를 아는 것. 사도 바울도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겠지요.

5. 올해는 제 약함을 많이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드러냈습니다.

올해를 돌아보니, 더욱 제 자신에게 능력 없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사랑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만날 수 없고, 성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왜 주님은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가 따졌고, 모두가 홀로 있어 모두 외로워하는 시기에 모두를 한 번에 같은 분량으로 사랑할수 없는 제 모습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가끔 힘들다며 다리 주무르고 , 힘들어하는 표정들을 볼 때는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이곳 저곳 다 다닐 수 없는 제 육체에 절망도 해봅니다.

6. 대림절을 보내며, 두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두번째 초는 본래 ‘준비의 초, 베들레헴의 초’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초, 소망의 초를 켠 이후 제게는 이 두번째 촛불이 기쁨을 기다리는 순종의 초이기도 합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청년부에도 하나 둘 안 보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주님. 5살 전, 누구보다 잘 뛰었던 제게 다시 뛸 수 있는 다리를 주신다면, 저는 모든 성도들을 찾아갈텐데요. 제게 과분한 차 버리고 뛰어 다닐텐데요, 주님 뭐하세요?’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이 주신 마음의 대답은 참 소름끼칩니다. “정말?”

7. 제게 주신 장애는 제게 주신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제게 맡겨주신 현장에 못 박듯 주신 십자가. 그래서 장애가 능력이 됩니다.

제게 주신 것에 만족하는 것, 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그것이 범사의 감사입니다.

현재에 감사하는 사람, 그래서 미래에 소망이 있는 사람, 과거를 돌아보며 겸손할 수 있는 사람, 그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한승 달꿈예술학교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8. 지금 안 보이는 지체들, 코로나19로 인해 방황하고 혹은 흔들리고 뒤틀려버린 일상에, 어쩌면 기쁨과 소망을 다른 곳에 두고 살아가는 지체들도 있을 겁니다.

이들을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 35장을 읽으며 답을 찾습니다. ‘맡겨주신 곳에서 순종하며 기다리는 사람.’

레갑 자손들이 280년동안 8세대에 걸쳐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고, 파종도 하지 않고 그저 목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쁨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은 참된 목자를 기다리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순종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밤중에도 여전히 밖에서 기다렸던 삶으로 이어져(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누가복음 2장 8절), 우리에게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주는 다리놓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 날을 기다리며, 또한 다시 만날 교우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12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의 부족함을 알고 계시면서도 남아계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많은 아픔이 도사린 올해에도 어김없이 1년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저의 연약함으로 상처 받으셨다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샬롬.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