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진실일까
신은 과연 우리의 고난을 알고 있을까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전해

순교자

순교자

김은국 | 문학동네 | 326쪽 | 11,000원

1950년 10월, 6.25 전쟁이 한창일 때의 평양. 대학 강사였던 이 대위는 평양내 목사 14명이 공산군에 잡혀 12명이 사살되고 2명이 산 사건을 조사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사살된 12명의 목사는 순교자로, 살아남은 2명의 목사는 배교자로 지탄을 받습니다.

대강의 내용만 보자면 감동스러운 모양새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켜 죽었을 것 같은 12명의 목사를 중심으로, 2명의 배교자는 어떻게 살아남았고 왜 배교했는지에 초점이 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이 대위도 여기에 주안점을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이 책은 길지 않습니다. 328쪽입니다. 배경도 6·25 전쟁을 두고 있어 어렵지 않게 그림을 그리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합니다. 읽자고 마음먹고 읽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내용과 분량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렵게 읽었습니다. 솔직한 표현으로 답답하게 읽었습니다.

우선 메시지는 깊고 진중하나, 질질 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12명의 순교자와 2명의 배교자. 답을 처음에 제시하고는 이를 조사하라고 합니다.

답이 나와 있는데 왜 조사하라고 하는 겁니까? 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순교자가 순교자가 아니고, 배교자가 배교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답을 초반에 알게 되었으니 진짜 답을 어떻게 전개하느냐가 이 소설의 주안점이 되어야 하는데, 방식이 지루합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 조금 알려주다 뒤로 빼고, 다시 조금 알려주다 뒤로 빼면서 분량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상 답을 알려줄 때는 그다지 파급효과가 크지 않았습니다. 답을 알려주고 나서도 더 오래 갑니다.

또 하나는 정답을 밝히는 순간, 즉 왜 12명의 목사가 죽었고, 왜 2명의 목사가 살았는지에 대한 장면이 소설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절정의 순간임에도, 조금도 극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목사들을 죽인 자들이 어떻게 잡혔는지는 나오지도 않고, 그들과 주인공 이 대위가 대면하는 장면 또한 그다지 비중 있게 나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실의 이유, 왜 2명의 목사를 살렸는지에 대한 이유가 황당하다는데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만 몇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감상평을 써야 하니 다 읽고 나서 또 다시 읽었음에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재미 소설가로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가나 이 소설이 뛰어난 재능으로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이런 주제는 특별하지 않고, 소설적인 재미도 없는 편입니다.

처음 읽고 나서 이 소설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습니다. 감상평을 쓰기 위해 이 소설을 되짚어 보면서 알게 된 건, 이 소설의 핵심은 ‘12명의 동료 목사가 죽은 상황에서 2명의 목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가 아니라, ‘살아남은 2명의 목사가 이 사건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였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소설은 세상과 신에게 한 가지씩의 질문을 합니다. 세상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정말 진실일까?’, 신에게는 뒤표지에서 쓰인 대로 ‘신은 과연 우리의 고난을 알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걸, 진실로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추앙받는 지도자가 잘못을 하였음에도 사람들이 그를 여전히 따르고, 그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오해니 음모라 하는 건, 객관적으로 증명된 진실보다 내가 믿는 진실을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게 틀리지 않았다는 진실. 결국 추앙받는 그보다 추앙하는 내가, 신뢰를 받는 대상보다 신뢰하는 내가 더 중요한 겁니다.

사람들은 사실 진실에 관심이 없습니다. 조사를 하면서 살아남은 2명의 목사 중 한 명인 신 목사에게 다그칩니다. “목사님, 사람들은 이미 진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을 얘기하십시오.”

신 목사는 말합니다.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소?”(103쪽)

영화 순교자
▲1965년 유현목 연출, 김진규·남궁원 주연으로 영화화된 <순교자>.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신의 존재 여부를 묻습니다. 신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이런 절망을 만들 리 없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질문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도 나옵니다. 이 질문은 기독교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 뜻이 있다”로 귀결됩니다. 허무하기까지 한 답을 접하자면 신에 대한 불신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일찍부터 무너졌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건, 그 허무하기도 한 답을 믿고 삶 속에서 살아내는 사람들로 인해서입니다.

평양에 공습이 내려 곧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한다는 걸 알게 된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이 군사정보를 알리면서, 평양을 떠나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떠났던 신 목사가 평양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인간이 희망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거기서 보았소. 그렇소. 당신이 환상이라 부른 그 영원한 희망 말이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난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던 겁니다.”(271쪽)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지금의 환난이 극복되는 건 아닙니다. 신의 존재를 믿건 믿지 않건, 삶은 늘 고달프고 고난은 늘 쉬지 않고 내 곁에 머뭅니다. 또한 분명한 건, 신 목사의 말대로 이 세상에선 희망과 약속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하시지만,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에 대해 한 톨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전하는 사람들로 인해, 기독교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 믿어야 하는 겁니다.

하늘이 주는 희망과 약속은 세상의 진실보다 강합니다. 내가 믿는 진실을 무너뜨립니다. 내가 믿는 진실이 무너진다 해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추앙하고 있고 신뢰하는 대상이 모래성처럼 헐거운 허장성세였다 해도 의연할 수 있는 건, 하늘이 주는 희망과 약속은 단단한 진리의 성(城)이기 때문입니다.

배교자로 지탄을 받는 신 목사의 한결같은 믿음의 모습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다시 신뢰합니다. 진실을 저편에 두고 오해를 안고 살아도 삶으로 진리를 증명한다면, 진실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음을 깨우치게 합니다.

그것이 다만 여러 굴욕과 억울함으로 점철된 긴 시간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해도, 진리를 증명함에 필요한 대가라는 걸 상기하자면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답을 일찍 알려주고, 우리가 알고 있던 진실을 깨부순 후의 끝을 길게 다룬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 소설의 장소는 몇 곳 되지 않고 주제도 뚜렷해서 ‘연극으로 해도 되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연극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적인 재미가 뛰어나지 않고, ‘기독교 소설의 전범’이라 하기에도 망설여지지만, 신앙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통한 성찰을 주기에 충분한 소설인 건 분명합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