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 
칼빈은 『기독교강요』 (1559) 4권 20장에서 시민정부의 역할에 대해 신학적인 견해를 상세하게 제시했다. 칼빈은 시민정부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중적인 통치기관의 둘째 기관으로서 시민사회의 정의와 사회전체의 도덕성을 확립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확신했기에 여덟 가지 주제들을 다뤘다.

1. 정부들의 구별 (IV.20.1-2)
2. 군주: 법률의 수호자와 집행자 (IV.20.3)
3. 군주들의 업무들, 군주들의 취임 (IV.20.3-8)
4. 군주들의 특권들과 책무들 (IV.20.9-13)
5. 법률의 규칙 (IV.20.14-16)
6. 법정들 (IV.20.17-21)
7. 시민들로부터의 복종과 경의 (IV.20.22-29)
8. 법률적인 수단들 (IV.20.30-32)

이상에서 칼빈이 정치적인 사항에 대해서 핵심으로 다룬 주제들을 압축하면 세 가지 사항이다: 첫째는 법의 수호자로서의 군주, 둘째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법률, 셋째는 합당한 판단력을 가진 시민들이다. 특히 칼빈은 1559년 이후로 능동적인 저항권을 인정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칼빈은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던 재세례파와 달리, 정치적인 직위를 가진 자들이 시민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세속 정부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대행자들’이라고 보았고(IV.20.6), 가장 거룩하고도 명예로운 소명이라고 해석했다 (IV.20.25). 칼빈주의는 시민 정부에 대해서,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1559년, 프랑스 신앙고백서로 알려진 “갈리칸 고백서”(Confessio Gallicana)가 프랑스 개신교회들의 모임에서 채택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칼빈의 신학이었다. 칼빈은 배후에서 이 고백서의 형성에 깊이 간여했었다. 이 중요한 프랑스 개혁교회의 고백서 마지막 항목, 35조에서는 세상의 정부와 권세에 대한 칼빈의 정치적 견해가 반영되어져 있다. 그 무렵은 프랑스 국왕 앙리 2세 (1547-1559 재위)가 개신교회를 탄압하던 절정기였다. 35조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무질서를 방지하시고자 법률과 통치자들을 제정하셨음을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왕국들과 국가들과 다른 군주들을 설립하게 하셨고, 권세자들의 손에 칼을 들려주셨다 (마 17:24-27, 롬 12:1 이하, 벧전 2:13-14). 군주들에게 권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법칙들에 저항하는 범죄들을 진압하라는 것이다. 권세자들은 합당하고도 거룩하게 권한을 행사해야만 한다. 시민들은 국가의 합당한 법질서에 순응해야만 하고, 불신자가 다스리는 경우에도 허용해야만 한다.

칼빈의 세속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560), “벨직 신앙고백서” (1561)에서도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칼빈의 정치적 사상은 교회가 시민정부와 국왕에 대해서 논의할 때에 핵심적인 논지가 되었던 것이다.

칼빈은 합법적인 정부와 독재를 구분하면서, 고전적인 공화정 체제 (republicanism)를 지지했다. 한사람의 군주가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되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고문이나 조언자들이 왕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창세기 49장 주석에서, 바로 왕을 돕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요셉을 통해서 선행이 시행되었고, 시민들의 복지와 경제적인 풍요가 준비되었으며, 법질서가 정당하게 집행되었다고 보았다. 칼빈이 공화정치를 선호했던 이유는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정의와 질서를 지켜나가는데 필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들과 재판관을 세울 때에, 모세가 직접 임명하지 않고 그들 중에서 선택을 받도록 했음에 주목했다. 신명기 1장 13절에서는 “너희는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너희 수령으로 삼으리라”고 하였다. 시민들의 선택에 의해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그리고 재판관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 1:4-16). 칼빈은 히브리인들의 공화국에서는 고전적인 공화정, 선출제도가 근간을 이루고 있었고, 대표자들이 통치하는 방식이었음을 지적했다.

출애굽기 18장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단일 군주 바로 왕에게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각 지파별로 장로들을 선출하게 하는 이드로의 조언이야말로, 공화정 체제의 서막이라고 보았다.

1561년에 칼빈은 사무엘상 8장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군주의 위험성과 정부의 합법적인 권한의 한계, 민간 정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등을 언급했다. 사무엘상 8장의 상황을 보면, 군왕을 선출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권한이 아니었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지 않았는데, 백성들에게 폭정을 일삼으며 권위를 남용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가서 5장 5절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통치자들이 선출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제시했다. 이스라엘에서 목자들은 통치자들이나 다름이 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군주의 폭정과 혼란스러운 자유방임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국민들의 선출을 통해서 보편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방법이다고 역설했다.

칼빈의 합법적인 저항이론은 그의 생애 후반에 나왔다. 세상의 군주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입을 열어서 말씀하시면 (qui ubi sacrum os aperuit), 모든 사람들은 들어야만 한다. 위에서 통치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고 확고하게 선포했다. 모든 권세자들은 하나님에게 복종해야하고,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권한을 실행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에게 보다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고 강변했다.

칼빈의 출애굽기 주석에 보면, 히브리인들의 번성을 막으려는 바로 왕이 모든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살인명령을 내렸음에도, 히브리 산파들이 거부했던 것이 옳다고 하였다. 칼빈은 세상의 군왕에게 생명을 해치도록 권한을 주신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칼빈은 군주의 저급한 정치적 선택은 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칼빈이 저항의 신학이라든가, 이론을 체계화해서 강조했었던가? 사실, 칼빈은 프랑스 종교전쟁의 상황에서, 군주의 권세를 뒤엎으려는 전쟁을 가능한 자제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개신교에 대한 바시의 학살 (1562년) 이 일어나자, 꽁드의 군주, 루이 1세 부르봉 왕이 시작한 위그노들의 봉기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프랑스 국왕이 된 후에는 전혀 입장을 바꾸고 말았다. 부르봉은 파리의 왕궁에 머물면서 완전히 개신교 신앙을 포기해버렸다. 마치 로마시대의 줄리안 황제처럼 한 때에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후에는 이를 번복해 버린 배교자와 다를 바 없었다.

칼빈의 신학과 정치사상은 프랑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네델란드, 청교도들에게로 서서히 확산되어나가면서,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 볼 수 없던 정치적 정서와 적극적인 참여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칼빈의 신학과 교회에서 영향을 받은 칼빈주의 교회들이 정착된 지역에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개념들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칼빈이 남긴 시민 정부와 그 통치 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 사회적인 분야에서 다양하게 계시하시는 수단들을 주셨음에 유의하고, 인간 이성과 역사, 전통, 경험에 기초한 통치원리들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타락의 영향을 받아서, 정당성을 의심하고 시험해봐야 하는 인간의 선(a distrust of human goodness)에 대해서 신뢰하지 말라.

셋째, 다수의 위정자들과 통치자들과 함께 협의해서 결정권을 행사하라. 단 한 사람이 독점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넷째, 통치에 합의안을 만들어내는 지역 지도자들은 선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인 협의 과정이 없다면, 상위 계급의 통치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

다섯째,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서 다양한 대표자들이 권한을 행사하여야 한다.

여섯째, 통치자들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점검하여야 하고, 시민정부의 행정에 대해서 더 낮은 기관들로부터 점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러한 칼빈의 정치적인 조언들이 다양하게 역사 속에서 기여함으로써, 근대민주주의 발전과정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개혁주의 교회들과 성도들은 선거를 통해서 시민정부를 평가하는 장치를 확고하게 수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