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서울대공원
▲서울대공원의 코끼리. ⓒ크투 DB
아프리카에 아카시아 나무가 살고 있다. 이 나무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둘 있는데, 하나는 아프리카 코끼리이고 다른 하나는 나방의 유충이다.

아프리카 코끼리는 아카시아 나무를 먹을 때, 열매도 함께 먹어 치운다고 한다. 거대한 코끼리가 아카시아 나무를 먹어 치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카시아 나무가 완전히 없어질 것 같아 보이는데, 정작 아카시아 나무가 무서워하는 것은 거대한 코끼리가 아니라 미물에 불과한 조그마한 나방의 유충이다.

이 유충은 아카시아 나무의 열매를 먹을 뿐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씨앗까지 갉아먹을 수 있어, 아프리카 아카시아를 멸종시킬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인 셈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아프리카 코끼리가 아카시아 열매에 치명적인 유충을 다 먹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코끼리가 유충만 먹는 게 아니라 아카시아 열매까지 함께 삼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카시아 열매의 입장에선, 유충에게 먹히든 코끼리에게 먹히든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코끼리는 아카시아 열매의 씨앗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씨앗은 거름이 되는 배설물과 함께 밖에 버려진다. 그렇게 떨어진 씨앗이 배설물을 거름 삼아 싹을 틔워 새로운 아카시아 나무로 성장한다.

우선 보기에 거대한 코끼리가 아카시아 잎과 열매를 다 먹어치우므로, 아카시아 나무가 완전히 멸종할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코끼리의 이동 반경은 수백 km가 넘는다고 한다. 사실은 아카시아 씨앗을 수백 km를 다니면서 넓게 퍼뜨려주고 있기 때문에, 아카시아 나무는 멸종되지 않고 곳곳에 계속 살아서 종을 퍼뜨려나가게 된다.

때문에 아카시아 나무 입장에서 볼 때 우선은 코끼리가 원망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사실 자신의 씨앗을 완전히 갉아먹어버릴 수 있는 유충을 없애준다는 점에서 코끼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무엇보다 아카시아 나무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종족 퍼뜨림을 친절하게 잘 수행해준다는 점에서, 아프리카 코끼리에게 더 큰 감사를 돌려야 한다.

하지만 아프리카 코끼리에게 아카시아 나무를 배려하는 마음이 전혀 없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코끼리는 오직 자기 배만 채울 뿐이다. 때문에 아카시아 나무가 감사해야 할 진정한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비록 아카시아 나무가 일방적으로 먹히고 희생되는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을 통해 널리 종족을 보존하고 퍼뜨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수년 전, 존 번연(John Bunyan)의 위대한 작품 <천로역정>에 나오는 배경인 영국 베드포드(Bedford)를 방문한 적이 있다. 존 번연은 금지됐던 설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6개월 선고를 받고 말았다.

사랑하는 그의 아내가 런던 시의 재판관이 머물고 있던 여관으로 찾아가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여관 앞에서 당시 애절하게 부탁했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사진을 찍은 기억이 생생하다.

번연 부인의 부탁에 시에서 온 재판관은 좋게 해결해주겠노라고 답했다. 그런데 막상 재판이 열리자 지방 판사들의 눈치를 보느라, 무려 12년이란 말도 안 되는 형을 선고하고 말았다.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6개월 감옥살이로 끝냈을 것을 부인이 부탁하는 바람에 12년 감옥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6개월의 24배나 많은 형을 더 살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혹을 떼려다 완전 혹을 붙인 셈이다. 12년간 옥살이를 한 그곳은 지금 땅바닥에 기록만 남겨진 채 번화가로 바뀌어 있었다.

원래 시에서 온 판사는 번연 부인의 애절한 호소에 마음이 움직여, 번연을 무죄 석방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미리 알아챈 지방 판사들이 시 판사의 비리를 왕에게 보고하겠다고 협박해, 무려 12년형을 선고받고 만 것이다.

이렇게 억울한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는 번연에게 12년형을 선고한 시 판사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 왜 그럴까?

그가 아니었다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출간된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6개월 형을 살았다면, 과연 <천로역정>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물론 시에서 온 판사에게 번연이나 그 아내를 위한 마음이나 <천로역정> 독자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비리가 왕에게 들어가 해를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지방 판사들도 기대하지 않던 12년형을 선고한 것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 감사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 당연히 하나님이다. 자신의 비리가 들통나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터무니없는 판결을 내린 시 판사의 나쁜 재판을 선용하셔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천로역정>이란 위대한 작품을 탄생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억울한 일을 당해 낙심 중인 분이 있는가?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이 없어 절망 중인 분이 있는가? 힘든 가운데 더 견딜 수 없는 일을 당해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고 있는 분이 있는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기억하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란 말에 주목하자. ‘좋은 것’뿐 아니라, ‘나쁜 것’도 포함됨을 기억하자.

아프리카 아카시아 나무나 존 번연의 경우처럼, 어떤 절망적인 순간에도 우리를 위대한 작품으로 빚어 가시고야 마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계획과 의지만 바라보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
▲신성욱 교수.
신성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고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