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들 미디어 출연에 관여된 명예욕과 물욕
불교 무소유, 믿음 한 부분 아닌 핵심 실천 원리
혜민 치부 행각, 그의 깨달음 진정성 의심케 해

혜민 승려
▲방송에서 "행복은 소유가 아닌 감상"이라고 가르치던 승려 혜민. 건물주 논란과 각종 실언, 부실한 수행으로 대중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tvN
◈성직자와 명예: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미디어 출연

승려 혜민 논란은 본인의 전면 활동 중단 선언으로 막을 내렸다. 그 와중에도 그는 2008년 승려가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안거수행을 한 적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지막까지 종교적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하였다.

승려 혜민 논란이 미디어 출연을 생각하는 기독교 교역자들에게 타산지석이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성직자의 미디어 출연 의도가 대개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다는 점을 확증해준 사례로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둘째는 성직자가 물질의 소유에 얽매이는 삶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해준 사례로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성직자의 미디어 출연 의도는 왜 대개 불순한 것으로 드러나는가? 일단 유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등종교는 개개인이 사회적 명성과 영달을 추구하는 것을 질타하고 죄악시한다. 세부적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각 종교의 관점에서 개인의 사회적 명성은 그 종교가 가르치는 초월의 도(道)를 따르는 데 있어 큰 장애물로 여겨진다.

오로지 유교만이 원칙적으로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는 일을 수긍하는 현세주의적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한국 사회에서 종교인으로서 사는 데 커다란 장애물 역할을 한다.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생활 전반을 통해 유교적 가치를 학습한다. 유교의 가르침들이 모든 종교 사상과 믿음에 앞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어떠한 종교를 갖게 되더라도 ‘유교화된’ 믿음을 탈피하지 못한다. 소위 종교들의 ‘토착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역사학자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그의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인들의 유교와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유교가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과도하게 결여되어 있는 반면, 불교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너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양측 모두를 명목상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유교든 불교든 자신의 한 부분으로 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진술은 유교의 과도한 현세주의, 명예추구 성격과 불교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성격이 상충된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신문화 내부에는 이 둘이 충돌하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인 중에서 온전한 불교도가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관찰한 것이다.

조선 선교사 헐버트
▲과거 조선에서 강의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조선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입국금지를 당했다. 한국인의 심성과 종교성, 특히 유교와 불교와 무속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시도했다.
유교의 가르침도 나름의 높은 도덕적 기준과 사상적 깊이를 갖는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다른 종교를 믿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유교 사상의 현세주의적 성격은 대부분의 고등종교가 가르치는 믿음과 크게 상충된다.

승려 혜민이 몸담은 선불교는 불성을 깨닫는 것, 만물의 공허함을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오욕(五慾)을 지목하는데, 그 중에는 명백히 명예욕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 역시 순전한 신앙의 장애물 가운데 하나로 명예욕을 지목하며, ‘사람의 영광(요 5:44, 12:43)’을 추구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결국 유교적 심성에 깊이 물든 한국인은 각기 믿고 있는 종교들에서 가르치는 초월을 향한 삶을 살기 어려운 태생적 약점을 갖는 셈이다. 한국인이 참된 종교인이 되려면 초월을 지향하는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 혜민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한국에서 성직자가 미디어 출연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직자와 소유: 경제적 이익 추구를 돕는 미디어 출연

성직자가 미디어 출연에 집착하는 데는 명예욕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욕 못지않게 물욕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사회적 명성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요즘처럼 세간에서의 인지도가 즉각적으로 경제적 이익으로 전환되는 뉴미디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승려 혜민의 사업 행적을 보면, 자신의 명성을 경제적 이익으로 전환하는 데 전심을 다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법적으로나 사회 통념상 이런 행적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는다.

종교단체들도 인간이 모이는 집단인 이상 각각의 종교적 믿음을 보존하고 실천하는 데 필요한 일정 수준의 재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일련의 사업활동을 펼치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단체의 재화 소유나 사업활동이 문제시되는 때는 대개 획득한 재화의 사용처가 불분명하거나 부적절한 경우들이다. 승려 혜민의 경우는 재화의 사용처가 부적절한 점이 문제가 되었다.

저술과 미디어 활동, 그리고 사업으로 얻은 재화를 불교의 깨달음 전파나 불교 신도들의 복지 등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치와 치부(致富)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 대중의 비판을 자초한 것이다.

혜민 명상 코끼리
▲승려 혜민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명상앱 <코끼리>, 사업적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유대교와 이슬람의 경우 물욕에 잠식되는 일은 경계하지만, 물질의 풍성함 역시 신의 축복의 일환이라고 믿는다. 반면 기독교와 불교의 경우 물욕을 경계할 뿐 아니라 과도한 소유 자체도 경계한다.

기독교에서 재화의 소유는 원칙적으로 생활의 기본적 필요 충족을 위한 수단,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불교에서는 재화의 소유에 대한 경계심이 기독교보다도 더하다. 불교에서 물질의 소유는 석가여래의 깨달음과 상극을 이루는 개념이다.

석가의 가르침 전반은 기본적으로 공허(空虛)의 존재론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현상적 존재는 곧 공허함이고, 공허함은 곧 현상적 존재라는 깨달음을 추구한다.

불교적 실재(實在) 이해는 현상적 존재와 실재적 공(空)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역설의 논리에 입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상대적으로 더 근원적인 차원이 있다면 현상보다는 공이다.

공의 지평에서는 모든 것이 비워져 있어, 서로 분별 없는 하나의 일체가 된다. 이 무한한 일체로서의 공이 우리 삶의 현상적 실제와 하나된 채 그것의 기원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불교는 조화와 자비를 중시한다. 또한 공허함으로 차별이 없는 실재를 망각하고 현상적 개별자들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 집착은 일단 공의 실재에 맞게 비움을 체득하며 살아야 할 불교적 실천에도 맞지 않고, 인식적 차원에서는 현상적 개별자에 대한 대상화, 집착이 되기 때문에 진리 자각에도 장애물이 된다. 이런 이유로 불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무소유의 체득, 무소유의 실천을 강조한다.

무소유가 믿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거의 핵심적인 실천 원리를 이룬다. 한국은 유교와 함께 오랜 세월 불교를 정신문화의 한 기둥으로 삼아온 나라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불교가 추구하는 초월과 깨달음의 도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수덕사 스님 승려 좌선 공 불교
▲수덕사에서 좌선중인 승려들. 불교 수행법 가운데 하나인 좌선은 공(空)한 실재를 체득하는 방법으로서, 영겁과 무한의 비움에 대한 자각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대표한다. ⓒ수덕사
그런 한국인들 입장에서, 승려 혜민의 치부 행각은 그가 깨달았다고 하는 깨달음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의 저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진술한 것처럼 그가 과연 명예욕이나 물욕을 ‘멈춘’ 적이 있는지, 그에게 과연 ‘보이는 것’이 있었는지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상충되는 행적을 보인 성직자가 종파의 얼굴로 활동해온 까닭에, 조계종을 비롯한 한국 불교계 전반은 당분간 대중의 실망어린 눈총 혹은 조롱섞인 비난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실천 없이 명예와 부를 좇았던 세속화된 한 성직자 때문에 그 믿음 자체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이런 상황은, 기독교계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전해준다.

미디어를 통해 성직자의 신앙과 삶을 내세운다는 것은 대단한 수준의 실천과 용기가 필요한 일일 뿐더러, 대부분 그 저의가 의심되는 일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그 속성상 대중이 원하는 이상적 이미지 구축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꾸며진 이미지는 얼마간 유효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행적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마련인 온라인-모바일 시대에 이렇게 꾸며진 이미지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해당 성직자의 삶의 본모습은 신상털기나 온라인-모바일 상의 소문 등에 의해 곧 밝혀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성직자 미디어 출연의 가장 특징적인 명암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 교역자들의 미디어 출연 결정은 신중해야 하며, 신앙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절제된 수준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승려 혜민 저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승려 혜민의 저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저서의 가르침과 실제 삶의 커다란 괴리 때문에 그에 대한 대중의 실망감이 크게 증폭되었다. ⓒ수오서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