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의 마지막 장,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계 22:21)”는 ‘은혜의 시복(施福)’으로 장식되고 있다.

이 말씀은 대개 서신서(書信書)들에서 독자들과 작별 인사용으로 상용됐지만(롬 16:2, 고전 16:23, 빌 4:23), 여기선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것이 거대한 성경 파노라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이고, 또 은혜로 종결해 주심으로 불완전한 죄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다는 점에서이다. 만일 “너희 모두가 완전할지어다”로 마감했다면,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율법의 미완성 자’로 남게 해 정죄 아래 떨어지게 했을 것이다.

이 ‘은혜의 시복’이 바로 앞절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0:20)”라는 기원도 가능하게 했다. 은혜로 마감되기에, ‘주의 오심’을 완벽히 준비 못한 자도 그런 염원을 가능하게 해 준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찬 545장)’는 찬송가 노랫말 그대로이다. 우리의 불완전했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부르신 이가(갈 1:6) 마지막에도 우리를 은혜로 영접하실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엔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기에 ‘은혜’로 불러주셨지만, 마지막엔 ‘공의(율법)’로 마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충분히 완전해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죄인은 ‘시종(始終)’ 불완전하다. 초심자(greenhorn) 때나 숙련가(expert)때나 다 ‘오십보 백보’이다. 신앙의 연조가 쌓였다고, 성경을 많이 알게 됐다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경험치이다.

설익긴 했지만 어쩌면 오히려 초심자 때 더 진지하고 순수했을지 모른다. 이는 우리만의 경험이 아니다. ‘처음 사랑’을 잃고 책망을 받은 에베소 교회(계 2:4)도 같은 케이스이다.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말라(히 10:38)”고 한 것도 같은 우려의 표현이다.

연약한 죄인은 ‘시종(始終)’ 은혜로 다뤄져야 한다. 아무리 ‘시작과 과정’이 은혜로 진행됐어도, 율법으로 ‘마감’된다면 그 간의 모든 은혜는 무산되고, ‘율법의 정죄’에 빠진다.

무엇보다 은혜에 길들였던 자를 모든 것이 바닥난 삶의 끝자락에서 율법으로 마감시키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로마 천주교인, 칭의 유보자들, 안식교인들은 하나님이 ‘시작과 과정’은 은혜로 경륜하다가, 마지막 땐 ‘공의(율법)’로 마감하신단다.

‘은혜’로 부름을 받았던 이들이 ‘율법주의’에로 빠졌던 사람들을 꾸짖으셨던 분(갈 1:6)이 그렇게 하실 리 만무하다. 처음 우리를 부르셨을 때나 마지막 마감 때나, 하나님은 죄인을 오직 은혜로 세우신다.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 맘을 고치시고 구원하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찬 337장)’. 작가는 시종(始終),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용납받음을 노래했다.

◈은혜로 경륜하신다?

이는 불완전하고 허물진 우리를 그대로 용납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가 아닌 불법이다. ‘은혜로 경륜하신다’는 말의 정확한 뜻은 불완전한 죄인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 받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義)’로 덮으신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에게서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힌 것(창 3:21)”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주셨다’는 실물 교훈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 하나님이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칭의’란 본래,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 더 이상 그들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진 우리에게서 옛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으신다면,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그렇게 봐야 한다.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6-17)”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의 요청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맨 속살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로 옷입은 우리 자신을(갈 3:27)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옛 모습을 보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신을 보는 것이 여전히 낯설다. 기어코 그들을 덮은 ‘의의 옷’을 들치고 숨겨진 ‘옛사람의 속살’만을 보려 한다.

이것이 율법주의적인 자아인식이다. 은혜의 시각을 가진 자는 자기를 바라볼 때 마다 ‘그리스도의 의(義)’로 덮인 자신을 본다.

◈은혜의 담력과 열매들

율법주의적이고 왜곡된 자아인식은 우리에게서 믿음의 담력을 빼앗고, 우리를 죄의식에 빠뜨린다. ‘의인이 사자같이 담대한 것(잠 28:1)’은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의 의(義)’를 봄으로 생겨나는 ‘믿음의 담력’을 말한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딤후 2:1)”는 말씀에서 ‘강함’을 ‘그리스도 예수 안의 은혜’ 와 연결지운 것도 ‘강함’의 원천이 ‘그리스도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힘써 대장부가 되라(왕상 2:2)’고 한 것이나,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고 한 것은 그들 안의 ‘남성다움’을 일깨운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의(義)의 담력’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율법이 충족됨으로 주어지는 것은 ‘담력’뿐이 아니다. 실제 따라 나오는 결과물들이 있다. ‘상급(reward)’도 그 중 하나이다. 그것은 율법의 요구인 ‘죄 빚’을 청산한 후에 따라오는 ‘잉여 의(surplus righteousness, 剩餘義)’의 산물이다. 이는 마치 ‘빚’을 청산한 자에게만 ‘저축’이 가능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상급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의’로 내게서 ‘율법의 요구’가 다 충족됐음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내게 율법의 유일한 충족인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나의 모든 ‘의’는 율법의 요구에 소용돼(아무리 대어도 소용에 부족하다) ‘잉여 의(剩餘 義)’를 산출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상급도 기대할 수 없다.

‘징계(discipline)’ 역시 율법이 충족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징계’란 ‘그리스도의 의’로 율법을 충족시킨 결과 ‘율법의 종’에서 ‘아들’로 승격된 자(갈 4:4-5)에게 따르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그에게 율법의 충족인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그는 ‘심판(judgment)’의 대상이지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징계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이 ‘아들’ 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사랑의 채찍’이기 때문이다(히 12:6-7).

반면 ‘그리스도의 의’의 결핍으로 율법이 충족되지 못할 때 따라 나오는 것들도 있다. ‘지옥, 죄의식’ 등이 그것이다. ‘율법, 지옥, 죄의식’ 은 속성상 서로 닮아 있고, 동일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스도의 의(義)’ 외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율법’. 율법의 유일충족(唯一充足)인 ‘그리스도의 의’가 없어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 율법의 요구인 ‘그리스도의 의’를 갖지 못한 채무감에서 오는 ‘죄의식’.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므로 나오는 결과물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 율법의 완성을 이루기 전에는 ‘지옥문’도 ‘죄의식’도 영원히 제거되지 않는다.

‘거머리, 지옥, 아이배지 못하는 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족하다 하지 않는 불(잠 30:15-16)’은 ‘그리스도의 의’로 충족되지 않으면 영원히 마감되지 않는 ‘율법, 지옥, 죄의식’의 속성들을 예표 한다.

당신에게는 율법의 유일 충족인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가? ‘지옥문’도 ‘죄의식’도 용납하지 말라.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