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총장
이스라엘의 영농 절기는 오순절, 칠칠절, 초막절이다. 추수감사는 초막절 행사였다. 이제 ‘감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을 생긴 그대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평화(샬롬)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그만둘 때이며
행복은 그러한 마음이 위로받을 때이며
기쁨은 비워진 두 마음이 부딪힐 때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황대권).

오늘만큼은 행복한 세상을 볼 수 있는 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괴테는 「경고」란 시를 지었다.

“어디까지 방황하며 멀리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것은 여기 아주 가까이 있다. 행복을 잡는 방법을 알아 두어라,
행복이란 언제나 네 곁에 있다. 감사는 감사할 자격이 있어야 하고 감사할 축복을 받아야 할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주관적인 것이고, 선택적인 것이다. 외적 조건에 의하지 않는다.
돈이 감사의 조건이라면 이 세상에서 최고 부자 한 사람만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 감사의 조건이어야 한다.
‘행복, 성공, 사람’-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 덕목으로 여겨지는 이런 단어들도 모두 ‘생명’(살아있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한낱 군더더기나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벅차 올 것이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어야 됐던 사람이 일어나 땅을 딛고 설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직립인간(直立人間)으로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워서 보는 하늘이 아니라 서서 보는 하늘이 얼마나 더 화려한지!
목을 나긋나긋하게 돌리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음이 얼마나 신기한지!
온몸의 뼈가 울리는 지독한 통증 없이 재채기 한 번을 시원하게 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유방암을 치료하고 난 후 다시 척추(경추 3번)로 전이돼 척추암을 앓느라 병원에 입원했다가 쓴 소감문이다. 주인공은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 교수의 경우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런 고통이나 감격 없이 매일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이에게는 평생 소원이요 기도 제목이 되고 있다. ‘한 번만 걸어봤으면, 볼 수만 있다면, 들을 수만 있다면, 말할 수만 있다면, 먹을 수만 있다면, 살아 있기만 한다면…’ 이란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환란 중에 서 있으면 한없이 낮아지고, 한없이 단순해진다(simple). 기도가 절실할수록 길이가 짧아진다. 어떤 때는 ‘단 한 마디’로 축약된다. 그만큼 집중돼 있고 간절한 것이다.

비교하거나 구실(핑계)을 찾으면 감사할 수 없다. 10명의 나병 환자가 나음을 입었지만 찾아와 감사한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다(눅 17:11-19).

10%만이 감사의 특권과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나머지 9명은 왜 감사하지 못했는가? 그들의 이유를 상상해 보자.

①정말 나았는지. 먼저 확인해 봐야지
②지금은 나았으나 앞으로 재발할지도 몰라
③예수님께는 나중에 감사드려도 되겠지?
④이제 보니 내 병은 나병이 아니었던 것 같아
⑤다 나은 것이 아닐 거야, 일부분만 나은 것일지도 몰라
⑥제사장에게 먼저 보이는 것이 급선무야!
⑦아마 내 병이 지금 낫고 있는 중일 거야!
⑧다른 랍비들도 이런 일쯤은 할 수 있을거야!
⑨그 분이 나를 위해 수고해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잖아!
(작가 장영일 씨가 쓴 글 중에서)

그렇다. 감사하려고 마음먹으면, 수백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반대로 불평불만 하려 들면 그 또한 얼마든지 이유와 핑계를 댈 수 있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100데나리온 채무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로남불’하는 자가 얼마든지 있다. ‘장미꽃은 안 보고 가시만 보는가, 가시는 안 보고 장미꽃을 보는가?’ 하는 선택에 따라 같은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불만으로 갈라선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