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 진저 목자들이 양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에스겔 34장 1절)”.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떼가 모든 산과 높은 맷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에스겔 34장 4-6절)”.

에스겔서 34장 전체를 보면, 에스겔은 거짓 목자와 참 목자의 비유를 들어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만이 진정으로 살 길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만을 삶의 주관자로 여기고, 그 분께서 절대 순종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오도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자신에게만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들의 행위는 남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가한 악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려는 계획은 많은 죄들로 말미암아 수포로 돌아갔지만,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획하심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양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악한 지도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새로운 목자를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배신은 인간의 패역함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밝히 드러내줄 뿐입니다. 하나님의 총체적인 사역은 역사를 통해 그대로 성취되어 갑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친밀한 교제는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통해 다시 새롭게 이루어진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실 뿐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자기의 양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사악한 무리들을 반드시 처리하신다는 것 역시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타들어가는 가을의 절경은, 연신 입에서 쏟아내는 탄성과 함께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합니다. 또한 이곳에 묻혀 잠시 동안 안식을 누리는 선민들 앞에 고개를 숙이며, 그들의 깊은 노고에 대해 기쁜 찬송을 불러봅니다.

참 행복한 산상설교의 복음적 가르침으로, 여덟 가지 복음의 참 행복을 누리는 길을 묵상하고 성찰하면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점검하면 많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더 깊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하나 하나 지켜가도록 무던히 노력하며 실천하는 삶 속에서, 하늘나라에 자그마한 내 집을 짓기 위해 이 땅에서 믿음으로 본을 보여주셨던 거룩한 선민들이 모여 계신 아름다운 동산을 찾아갈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낍니다.

예기치 못한 작은 바이러스인 코로나19로 힘들고 지친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 역시 날로 쇠약해지고, 우리 일상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당연시하던 일들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삶의 태도를 바꾸어 새로운 길로 나아가도록 선민들께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평안의 안식을 누리는 선민들께서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랐던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쉬고 있는 이 곳에만 오면 나의 연약함과 믿음 적음이 부족함을 느끼면서, 또 다른 시작과 각오의 용기가 피어오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덤은 가기 두려운 곳이었고, 돌아가더라도 될 수 있으면 피해가고 싶었고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오히려 다정한 곳으로, 자주 가 보고 싶은 곳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특히 양화진이나 곳곳에 주님의 일을 하다가 하늘나라로 이사가신 분들의 묘지를 지나가거나 방문할 때, 나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잠시 기도를 하면서 아련히 주님의 고결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무덤 앞에 서면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겸손해지고 허락된 삶의 시간을 더 충실히 살아가게 하는 묘한 힘이 생겨납니다.

여기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가 공존하는 곳, 그래서 무덤에는 숱한 이야기들이 쌓여 있습니다. 아직도 다하지 못한 말을 가슴에 담고 매일 찾아오는 발길 속에 묻어나는 사랑, 정성스레 손을 모으고 지난 일들을 기억하며 함께하는 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말들을 손편지에 고이 적어 전하는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얹어 놓습니다.

가을은 쏜살같이 익어갑니다. 잠시라도 멈추게 하고픈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하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자연은 인간의 욕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곧 들이닥칠 어두운 겨울을 준비하나 봅니다.

인간의 고통은 삶에서 흔하게 보고 만나지만, 여전히 낯섭니다. 거기에 얽매이거나 붙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때 우리는 마냥 당혹스럽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 고난 역경 어려움 문제
▲ⓒStocksnap.io
풍족하고 의롭게 살던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자녀와 재산을 다 잃고, 자기 몸까지 심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던 욥은, 왜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써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후 세 친구와 치열한 설전을 벌이며, 심지어 하나님께 끝까지 울부짖습니다.

욥은 마침내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원과 처지를 분명하게 깨닫고,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순종하게 이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욥처럼 이러한 수난을 당하게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욥과 같은 믿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여기에 평안의 안식을 누리는 선민들은 아마도 욥과 같은 신실한 믿음의 일꾼들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썩을 것들을 위하여 애를 태우며 자신의 명예와 자랑, 그것도 모자라 탐욕으로 얼룩진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오늘 이곳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믿음의 선배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을 비롯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묘지에서 그 뜻과 답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탐욕으로 많은 양들이 떠나갔는데, 정작 그들의 목자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사명은 온데간데없이, 자신의 권력과 탐욕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아직 떠나가지 않은 양들마저 이전에 떠나간 양들과 같은 경험을 또 다시 하게 될까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말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늙은 여우와 간교한 뱀으로 둔갑합니다. 사탄의 역사는 또 다시 시작되어, 수많은 양떼들을 현혹해서라도 자신의 영달을 누리려는 탐욕만이 교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또 다시 양들이 흩어지는 게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이 땅에서 이런 반복되는 사례를 만나지 않으려면, 믿음의 선배들이 지켜냈던 그 믿음의 정신과 용기와 행동을 본받는 삶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면서 이 곳 믿음의 선배들이 쉬고 있는 이곳에 오셔서, 그 분들 앞에서 고요하게 대화하는 시간들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