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모든 구성원들이 영적인 제사장인 것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만인이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교리의 중요성과 의미에 새로운 눈 뜨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도록 최선 다해야
이것이 한국교회, 이민교회가 새로운 차원으로

개혁되고 갱신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본다

정성욱
▲정성욱 교수.
요즘 한국교회나 이민교회에 속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대체로 신학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접근할 수 없고, 전임 목회자나 선교사들(소위 성직자라고 불리는)만이 추구할 수 있는 어떤 신성한 학문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신학을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교회사 2천년 동안 기독교를 대적해온 영지주의적 이원론의 부산물일 뿐이다. 소위 평신도와 사제직을 분리시키는 로마가톨릭적 망상일 뿐이다.

또한 신학자에 대해서도 엄청난 오해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학의 특정 분야에서 고도의 학문적 훈련을 거쳐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의 신학과나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면서 연구와 집필을 하는 전문적인 학자만을 신학자라고 여기는 것이 지배적인 추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학자에 대한 근거없는 편견이고, 신화일 뿐이다. 물론 전문적 훈련을 받고, 전문 분야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신학자로 부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런 소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학자들만이 신학자라는 생각은 성경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도리어 성경은 놀랍게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신학자라고 가르친다(theologianhood of all believers).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학자인 이유는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부르실 때 주님을 알고(Knowing God),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Learning from God),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Growing in the knowledge of God) 하시려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고 말씀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학자라고 할 때, 우리는 신학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려야 한다.

신학(神學)이란 무엇인가? 한자어로 보면 하나님 ‘신’과 배울 ‘학’, 즉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Theology’라는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theos’와 연구, 담론, 말씀, 논리, 이성을 뜻하는 ‘logos’라는 말이 결합된 말로서 ‘하나님에 대한 연구, 담론’을 의미한다.

신학을 어떻게 정의하든, 중요한 것은 ‘신학’이란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신학이란 말 대신에 사용된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the knowledge of God)’이라는 개념이다.

구약의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에서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6-7)”고 말씀하셨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서신의 수신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주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예를 들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라고 기도하고 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도 바울은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라고 기도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신학함에 있어서 자라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서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한다.

더 나아가 우리 주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신다. 영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정의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 즉 신학자인 것이다.

2016 SBL 성서학대회
▲지난 2016년 SBL에 왕대일 교수(맨 왼쪽) 등 국내 학자들이 참석한 모습. ⓒ크투 DB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정보적 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식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 그리고 헬라어로 ‘기노스코’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야다와 기노스코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얻게되는 경험적, 체험적, 실재적, 관계적인 앎을 의미한다.

물론 기노스코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정보적, 명제적 지식을 포함한다. 정보적, 명제적 지식이 없이 인격적, 관계적 지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런 지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보와 명제를 넘어서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체험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영적 교제의 삶 즉 영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그리스도인이 신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고 신학 교수가 아닐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적이고 체험적으로 깊이 알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신학자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신학, 유기적 신학, 체험적 신학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아가야 할 신학자로 부름을 받았고, 신학자로서 더욱더 성숙해가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게는 생각의 변화가 필요하며, 관점의 변혁이 요구된다.

“아, 나도 신학자구나!”라는 성경적 관점을 회복해서, 더욱 주님을 깊이 알아가는 일에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 제사장(Priesthood of all Believers)인 것처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자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 즉 날마다 주님을 알아감으로 영생을 누리는 그 일에 진보가 있어야 한다.

주님을 알아가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일차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정보와 우리가 인식해야할 내용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에 역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더 인격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체 성경을 통해서, 당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우리가 동일한 열정을 가지고 추구해야 할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주제에 따라 정리해 놓은 교리(doctrine)들을 아는 것이다.

교회 역사상 다양한 시대에 걸쳐서 제정되고 고백된 신경, 신조, 교리문답, 신앙고백 등을 통해서, 교회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확립해 왔다.

예를 들어 325년에 제정된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가장 탁월한 교리적 진술이다. 또 451년에 제정된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 그리고 그 두 본성의 완전한 연합에 대한 가장 신뢰할만한 교리적 진술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시간에 고백되는 사도신경 역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매우 간결하게 진술하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제정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The Scots Confession, 1560)이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17세기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3) 등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대한 영감에 찬 진술이다.

이러한 신경, 신조, 교리문답, 신앙고백에 기초해서 기독교 진리를 더 포괄적으로,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조직신학이다.

각 시대의 교회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인 교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유지했을 때, 그 교회들은 매우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로서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이민교회 내에서 교리에 대한 무관심, 냉담, 폄훼, 경멸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타락시키는 유일무이한 원인은 아닐지라도, 주요 원인들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영적인 제사장인 것처럼, 교회를 구성하는 만인이 신학자이다. 따라서 교회는 교리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고,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새로운 차원으로 개혁되고 갱신되는 지름길이다.

정성욱 박사
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저서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삶 속에 적용하는 LIFE 삼위일체 신학(이상 홍성사)>,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정성욱 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이상 부흥과개혁사)>,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큐리오스북스)>,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등